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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Jun 21. 2024

36 부품의 개성

시즌 4 HOW

언젠가 우리는 가정된 ‘전체’라는 허망한 과녁을 헛되이 연마하기보다, 현실 위에 놓여있는 단위 프로세스의 개별 ‘부분’들을 연마하는데 이를 수 있다. 예의 단위에 다다르고 이를 다시 경유하여 비로소 ‘개성’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가질 수 없는 포도를 신 포도라 질시하는 이솝우화의 여우와 굳이 닮을 필요는 없다손 치더라도, 어쨌거나 우리네 ‘개성’은 우리 자신의 가능성뿐 아니라 한계를 비롯해 그 한계를 초과하는 타인에 관한 선망 혹은 질시까지 지시하고 있을 양이다.


이를테면 각자의 개성을 비롯한 삶의 모든 문제를 퉁 쳐서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 ‘당연히’ 없듯, 모든 문제에 발을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의 ‘전체(본질)’ 따위도 ‘당연히’ 없다. ‘당연히’ 개인의 고정된 ‘본질(전체)’ 따위도 없다(그저 개성(차이)이 있을 뿐이다). 이 ‘고정된 본질(전체)이 없다’는 명제는 오히려 우리가 무슨 문제에서도 쉬이 발을 뺄 수 없게 만든다. 본질이라는 허황된 말로 무슨 세부 경험도 퉁 칠 수 없어야 하는 게 삶인 까닭이다. 그처럼, 역량의 문제는 퇴로 없이 모든 문제에 일일이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하곤 한다. 그토록 무수하게 실패할지언정.


그러니 다른 혹자가 주장하는 그 자신의 본질을 살핀다는 언변은, 과연 그 본질이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헛된 본질이라도 가정하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가정하고 있는지 그 양상을 추론하는 문제로 소급된다. 가령 어떤 사건의 원인이 어느 개인의 과대망상 덕택이라면, 과대망상 자체는 현실을 지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의 원인이기는 하니까. 우리가 사건의 원인을 추론할 때, ‘본질’을 가정한 인간이 예의 자의적 ‘본질’에 위배되는 현실을 위협하고 그 현실에 보복하기 위해 저지른 범행에 대해, 거기서 굳이 그 ‘본질’이 그 자체로 헛되든 헛되지 않든 상관없이, 그런 허황된 ‘본질’을 가정한 인간이라는 유형을 임의로 가정해야 비로소 추론과 분석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


예컨대 뭇사람들의 값싼 관심이라도 사기 위해 자기 내면에 ‘위대한’ 본질을 가정하여 스스로 믿고자 하는 유형이 있다고 해보자. 짐짓 진중한 표정으로 자기 내면에 언어나 기타 수단으로 표현할 수 없는 대단한 무엇이 있다는 주장을 이어가는 병리가 진지한 학술로서도 발현될 수 있다. 말하자면, 사회적 약속이라는 언어가 너무 천박해 당사자의 ‘희망’이나 ‘상상’을 양적으로는 몰라도 ‘질적으로’는 표현 불가능하다는 식의 증상이 그에겐 분초마다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여타의 타인이 예의 스스로 과대평가하는 내면의 ‘기능’에 대해 추론을 시작할까 봐서라도, 그는 기능으로 판단 당하지 않기 위해 기능적이고 형태적인 판단을 비하하며 ‘질적 판단’을 과대평가할 양이다. 설령, 굳이 겸손한 표정으로 그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더라도, 은연중에라도 결국 그는 자신을 소위 ‘전체’에 동일시하고자 하는 양상을 보여줄 모양이다. 이를테면, 겸손까지 자의식의 연출에 활용하는 등으로. 그리 기능으로 분할될 수 없는 어떤 내적 기이한 지대(라고 주장하는 장소)까지 관객들을 끌고 가서, 아울러 절대적으로 이해받지 못하리라 가정된 온갖 순교자들의 교설들을 끌고 와서, 관객에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양날의 평을 '굳이' 받아내고자 하리라.


허나 제아무리 신비로워 보이는 형용사들을 주워다 붙이며 시인들의 글귀를 애써 머금는들, 예컨대 그가 그 자신의 미움은 스스로 고귀하고 겸손하며 충분히 성숙한 미움이라고 별도로 주장하더라도 실상 그 미움은 다만 그저 평범한 미움 중 하나일 뿐이고, 그의 그 위대하고 숙련되고 통찰력 있다는 사랑 또한 누구나의 일상에 섞여 있는 딱 그 정도의 사랑일 뿐이다. 또한 그의 학술적 겸손과 진중한 학문의 정확성에 대한 구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내뱉었다는 고뇌의 딜레마도, 사실상 누구의 평범한 토라짐과 마찬가지로 그저 토라짐일 뿐 아니겠나.

그처럼 이해받을 수 없다는 엄청난 감정의 깊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미움이나 원망 따위가 다른 평범한 미움이나 원망과 ‘굳이?’ 구별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구분될 수 없음이, 그러니까 무턱대고 자랑스럽고 의기양양할 수 없음이 그에겐 엄청난 비극이고, 그 비극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여기에 대한 학술이 반드시 도래해야 한다면, 그는 이미 문학과 학문을 혼동하면서, 실은 누구의 삶이 그렇듯 스스로의 삶 또한 예의 ‘전체’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학술은 보편성과 필연성 사이에서, 그러니까 가장 평범한 평범성을 근거로 해야 소위 ‘설득력’을 가져갈 수 있을 텐데도 그는 굳이 선민의식을 위해 평범성을 희생하고 다른 학술들을 그 내용의 정확(진실)성 여부가 아닌, 당 저술가가 그 내용을 통해 의도했다고 가정하는 임의의 어림짐작 위에서 감상적 원망만 내용에 적당히 포개어 이어가곤 하지 않겠나.

그는 어째서 자신의 미움은 ‘질적으로’ 성숙한 미움이고, 또 이를 만인에게 (학술적으로라도) 인정받아야만 하고, 마찬가지로 소유한 모든 감정이 남들보다 ‘위대한’ 감정이어야 하며, 그게 관철되지 못한 비극을 학술적 주제로 풀어(/열어 밝혀) 여느 관객에게 주목을 받아야 하는가? 기실 ‘위대한’ 감정 따위가 세상에 존재하기나 하는가? 위대한 미움 따윈 없다. 그저 미움이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랑이 위대하다면, 그만이 위대한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누구의 사랑인들 사랑이 그 자체로 위대할 뿐일 터다. 시행착오 없이 그저 내면을 갑작스레 어느 날 깨달은 깊이 따위도 당연히 있을 수 없지 않겠나. 그저, 스스로 한갓 사물, 한갓 인간임을 인정할 수 없어 (소위 ‘일관’된) 전체성(의 환상)을 참칭하는 (‘이완’된) 응석의 배설이 거기 있을 뿐이다. 심지어 여느 사람들이 언급하는 진정한 위대함 그 자체조차 실은 흔히 이야기하는 ‘전체성’이 될 수 없지 않나. 최소한, 그와 같은 위대함을 평하는 관점조차 회고적으로만 도래할 테니.

그처럼 ‘가정된 전체’라는 양태는 스스로 도래하지 않는다. 이는 그저 부품으로서의 삶이 거부되는 방식으로만, 이를테면 도저히 모두의 관심을 계속 붙잡아 둘 수 없다는 불평의 형용사이자 좌절의 반대급부로서만 증상적으로 도래한다.

그러나, 기능적으로 우리는 매 작용들과 그 작용 간의 관계들 사이에서 작동할 뿐이므로, 가정된 전체가 존재하건 하지 않건 상관 없어지는 순간 이후에야 때마다의 작동 양상들을 탐사하고 가공하여 구조화하는데 이를 수 있다. 말하자면, 온갖 시행착오(비일관성)를 노력 속에서 남김없이 겪어야 하는 삶이 오직 거기 있을 뿐이다. 문법상의 전체 따위가 아니라 때마다 필요한 작용의 프로세스들이, 그리고 그 프로세스들의 관계 양상들이, 나아가 이 관계 양상들을 매번 다시 구조화하는 우리네 유효한 역량들이 거기 있을 뿐이다.

예의 역량들은 언제나, 그저 할 수 있는 것에서 출발하는바. 최초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또 그와 아울러 할 수 없는 것까지 지시하는 ‘개성’은 그러므로 하나의 가능성인 동시에 덫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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