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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Aug 04. 2024

제목없이 쓰는 글

얼마 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00세에  돌아가셨다.  초 고령의 나이신만큼,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어느 정도 그 가능성을 예상은 했었지만, 다시 회복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가졌었다. 돌아가시기 전 날, 저녁까지 잘 드시고 그날따라 유달리 기운이 있으셔서 이제 회복하실 수도 있으시겠다고 가족들은 낙관을 했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 의료진이나 다른 이들은, 100세를 사셨으니 행복한 삶이었다고 아버님의 죽음을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러나 가족들로서는,  아버님이 더 오래 우리 곁에서 계시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졌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에겐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경험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아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친척의 죽음을 가끔 전화로 접하기는 했었다.  지난해에, 대학교 때 친했던 친구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친구의 죽음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졸업 후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소식만 아주 가끔 듣고 있던 친구였지만, 대학 시절 몇 년 동안 잘 알고 지내던 친구라 며칠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었다. 너무 빨리, 갑자기 떠났기에 더 그랬다. 나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그 친구는 이제 알 것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떤지. 물어보고 싶었다. 한 때는 'Near death experience'에 흥미를 가지고 수십 권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후 세계가 궁금하다.


시아버지의 경우는 돌아가시기 전 몇 달 동안 병원으로 방문해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더 실감이 나질 않았다. 소식으로만 접했던 이전의 죽음과는 달리, 죽음 몇 시간 전에도 병상에 누워계시는 모습을 뵜기 때문에 몇 시간 뒤 기계가 멈추고 죽음이 선고되었을 때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계시는 모습을 보니, 죽음 전후의 괴리감을 느끼기가 힘이 들었다. 정말 돌아가신 건가, 바로 조금 전까지도 다시 회복하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죽음이 이렇게 간단한 건가. 이렇게 쉬운 건가. 'Near death experience' 책들에서 읽었던 것처럼 지금 아버님의 영혼이 빠져나가 이 병실 공중에서 본인의 모습을, 울고 있는 가족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걸까? 처음으로 시신을 만졌다. 손을 잡고 얼굴을 어루만졌다. 여전히 따뜻했다. 가족들과의 마지막 인사가 끝나고 시신은 병원 지하로 옮겨져 냉동실에 안치될 거라고 했다. 조금 전까지도 온갖 기계들과 튜브들이 연결되어 있었고, 의료진들은 순간순간 세세하게 돌보고 온갖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누구도 돌 보지 않고 짐처럼 옮겨져 보관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죽음 전과 후의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다.  조금 전까지도 그렇게 신경을 쓰고 집중 케어를 했었는데...  갑자기 한 산부인과 의사가 인공 유산에 대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엄마 뱃속에서 단지 몇 달이 더 지나서 태어나기만 한다면,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조금이라도 다칠까 봐 전전긍긍하며 사랑으로 키울 텐데, 단지 바깥으로 나오기 몇 달 전이라고 그 생명을 임의로 죽인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왜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날까.  출생과 사망의 정 반대의 상황이지만  둘 사이의 묘한 유사함이 느껴졌다.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 가족들은 병실을 떠나야 했다. 시아버지를 혼자 병실에 두고 떠나서는 안 될 것 같아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이제 혼자 남겨두고 떠나는 게 너무 매정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장례식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알게 되었다. 결정하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장례식회사와 묘지 회사가 달랐다. 각 회사를 두 번 이상 방문했다. 장례식과 묘지 매립과정에 관련되어 결정해야 하는 옵션들이 열몇 가지가 넘었다. 미국에서 돈이 없으면 죽지도 못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그런 말이 나올만했다. 예를 들면 관의 종류에 따라 가격 차이가 만 불 이상이 났다. 묘지 지면이 함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관을 싸는 ' Outer box'를 주 법령에 따라 의무적으로 구입해야 하는 데, 이 역시도 만 불 이상의 차이가 났다. 이름 등을 적기 위해  지면에 묻어두는 조그만 동판도 6천 불부터 시작해 만불이 훌쩍 넘어가게 다양했다. 또한 묘지로 쓰는 2.5-3ft*8ft 정도의 땅이 만불이 넘는다.  동판에 조각하는 무늬에 따라서도 가격 차이가 상당했다. 천막의 종류, 그리고 Outer box 표면과 관련해서도 장식에 따라 다양한 옵션들이 있었다. 또 꽃 장식들도 선택해야 했다.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들, 시신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 것인가. 모든 것에 기본적인 옵션들을 구입하더라도 최저 4-5만 불이 드는 것 같았다.  묘지(땅) 가격에는 평생 관리 비용이 들어있다. 이 가격의 일부는 펀드로 분배가 되어 만일 묘지 회사가 문을 닫더라도 이 펀드에 의해 묘지는 계속 관리가 된다.


이 모든 절차를 준비하면서, 나도 미리 준비를 해 두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도 역시나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단다. 묘지를 둘러보다가 헛웃음이 나왔다. 흔히들 인생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 죽을 때는 부나 신분의 차이가 없이 공평하게  누구나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 수많은 종류의 묘지들을 보니, 살아있을 때보다 죽은 후에 더 확실한 부귀의 차이가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면에 묘비만 있는 일반의 묘지와는 달리, 마치 로마시대 건축물을 재현하듯이 대리석으로 만든 벽과 지붕이 있거나, 문과 창문이 있거나, 울타리가 쳐져있거나, 정면에는 기둥을 세우고, 조경을 독립적으로 따로 해놓은 특별한 묘지들이 일반 묘지들 사이에 드문 드문 있었다. 물론 이들 특별한 묘지들 사이에서도 그 수준은 매우 다양했다. 백만장자와 억만장자의 집이 다르듯이 말이다.  집약된 공간이라 그 차이가 더 확연하게 느껴졌다.  처음에 드는 생각은, 저럴 거면 사유지를 사서 원하는 대로 묘지를 만들지, 공동묘지 중간중간에 구태여 저렇게 남들과 틀리게 만들어 눈에 띄게 해야 할 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것이 나의 편견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지회사가 그 옵션을 팔고 있으니 사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참배하러 와서 자신들만의 안락한 공간을 가질 수 있는 이점도 있지 않는가, So, why not? It's your  money afer all!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사망 전에 미리 구입을 하면 묘지도 장례식 비용도 둘 다 수천 불에서 수만 불이 할인된 가격으로(총비용이 얼마인가에 따라)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망 하루 또는 심지어 몇 시간 전이라도 이 할인 가격을 적용받을 수 있지만 반대로 몇 분 후라도 사망시각 이후에는 이 가격을 적용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남편과 나는 우리의 사망 후의 장례절차의 선택사항을 미리 다 결정을 해 두고 필요한 것을 미리 구입해 두자는 것에 동의했다.  태어날 땐 선택이나 준비가 필요 없었는데 돌아갈 땐 준비할 게 많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런 일들을 처리하고 다니느라 슬픔에 침잠할 여유가 없었다.  이래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가장 힘들 때는,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더 이상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도 전화를 거는 사람도 없이 조용한 시간을 마주할 때, 그때라고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죽음으로 인한 가족의 부재를 온전히 실감할 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80이 훌쩍 넘은 나의 친정 부모님은 60이 채 되시기 전에 이미 본인들의 묘지와 비석 등 필요한 모든 것을 세트로 구입해 두셨다. 자식들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묘지 관리소에 전화만 걸면 모든 걸 다 알아서 준비해 줄 거란다. 친정어머니는 내가 한국에 갈 때마다 본인이 구입한 묘지에 같이 가 보자고  하신다. 처음 갔을 때는 20%도 차지 않아 거의 비어있었는데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은 90% 넘게 차 있다. 부모님 앞 뒤 옆자리도 다 들어 차있다. 처음엔 묘지에 부모님과 함께 가는 게 불편해서 안 간다고 버티기도 했었다. 지금은 가자고 하시면 흔쾌히 간다. 본인이 마련해 둔 묘지에 가면 어머니가 느끼는 감정이 여러 가지리라 추측하지만, 내가 어렴풋이 느끼는 것은 어머니가 안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캠핑용 의자와 커피나 과일을 가져가 잠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피한다고 해서 오지 않을 일도 아니고 더 이상 어머니가 사후의 일을 얘기하실 때, 막으려고 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고 죽음과도 더 가까워지고 있다. 유서를 미리 써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아이들과도 그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다. 죽음은 아무리 미리 준비해도 갑작스럽다.  멀지 않은 미래에 부모의 죽음을 마주하면 감히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도 피할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이니,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겪을 수밖에 없고 또 닥치면 겪어내 지리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오늘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병원에서 찍은 사진들과 비디오들을 다시 봤다. 아버님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는 감히 아버님께 여쭐 수 없었지만, 만약을 대비해 아버님이 병원에 계실 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는지 여쭈어 보라고 몇 번이나 남편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결국 하지 못했다. 아버님은 하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시고 가셨을까? 서운했던 것은 생각나지 않고 잘해 주신 것만 생각이 나고, 내가 잘해드렸던 건 생각나지 않고 잘 못 해 드렸던 것만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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