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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군 Mar 13. 2024

#2.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뒤척이는 밤

03:00AM 모두가 잠드는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자세를 바꿔도 정신도 말짱 눈도 초롱초롱하게 떠진다. 오늘 오후에 잠깐 잤던 낮잠이 원인일 것이다. 뭐 사실 자주 있는 일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수면 패턴은 망가졌다.


잠이 오지 않은 밤에는 엉켜있던 생각의 실타래를 꺼내서 풀어본다. 차근차근 굴릴 때마다 다양한 생각과 감정들이 내 머릿속을 떠다닌다. 이것들은 각각의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열정적인 빨강의 기억을 풀어본다. 짝사랑했던 A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A의 문자 하나로 그 날의 기분이 정해질 정도로 A를 좋아했다. 'ㅋㅋㅋ'라는 간단한 카톡도 A를 빼닮은 이모티콘도 모든 것이 설렜고 마치 드라마 작가라도 된 듯 카톡 하나하나에 상황과 의미를 부여했고카톡 진동음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했다.


그렇게 설렜던 나날들이 무너진 건 한순간이었다. 같이 보자고 약속했던 영화를 자랑스럽게 혼자 봤다고 네가 말했을 때, 혼자 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돌아 볼 수 있었다.


너는 내 질문에 답만 하고, 나한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더라.


빨간 실타래를 저 멀리 닿지 않은 곳으로 던져버린다. 여기서 더 풀다가는 평생 흑역사로 박제 될 선택을 하고 말 것이다. 다른 초록색 실타래를 풀어본다. 인턴으로 속해있는 뉴미디어팀 회식 날이었다. 술에 취한 팀장님이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나 성훈씨 편집 마음에 들어요". 평소 칭찬에 매우 인색하신 팀장님이기에 이게 꿈인가 싶었다. 팀장님은 내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항상 믿고있다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하마터면 팀장님께 와락 안길 뻔 했다. 내가 팀에 민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인정 받았다는 사실이. 잘하고 있다는 말들이. 나의 무너진 자존감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이번에는 파란색 실타래를 풀어본다. 못 본 지 오래된 친구들이 몇 명 지나간다. 캐나다에서 이민을 준비하는 B, 1년에 한 번 연락하는 고등학교 친구 C, 연락 끊긴 지 오래된 대학교 선배 D, 군 생활 동안 버팀목이었던 동갑친구 E 등등 애정의 유무와 상관없이 생각난다.


나는 보통 친구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내향인의 성격도 있겠지만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라는 걱정도 있다. 인간관계는 쌍방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을 안다. 이번에는 꼭 먼저 연락해야지 다짐한다. 내일 연락할 사람의 리스트를 생각한다.

(*그리고 막상 일어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내일로 미룬다..)


남은 실타래를 한 번에 풀어본다. 서로 엉켜버린 실들이 더 엉켜지고 뭉쳐진다. 여러 가지 생각이 지나가면서 문득 나는 참 피곤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하게 살면 좋은 세상 왜 난이도를 올려서 복잡하게 살아가는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엉킨 실들을 보면서 속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랑도 직장생활도 인간관계도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이 실타래의 끝이란 게 있을까? 보이지 않는 끝까지 뻗어있는 실에 두려움이 느껴진다. 숨이 턱 막힌다. 작고 가볍게 보이던 실이 어느새 나를 짓누른다. 실뭉치가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두려움에 잠식된다.




(Over the Horizon)

기상나팔 처럼 알람음이 힘차게 울린다. 벌써 아침이 된 것이다. 눈을 뜬다. 커튼이 쳐져 있지 않은 창문에 햇살이 나를 반긴다. 작은 원룸 방에 고요한 포근함이 느껴진다. 따뜻한 평화였다. 빠르게 일어나 씻고 출근 준비를 한다.

부랴부랴 늦지 않게 버스 정류장으로 쪽으로 걸어가며 차가운 공기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본다. 새하얗 입김이 장난스럽게 나와서 사라진다. 


문득 내가 왜 두려웠나 생각했다. 뭐가 무서웠을까? 곰곰히 생각해 봐도 이유를 모르겠다. 무언가 나를 힘들게 했던 것 같은데 그 이유가 갑자기 지워졌다. 원래부터 이유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진동이 울린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문자가 와있었다. 출근 하기 싫다는 친한 누나. 어제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는 친구. 매번 레퍼토리가 똑같은 문자들이다. 묘하게 웃음이 지어진다. 발걸음이 이상하게 가볍다. 오늘은 일이 잘 풀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어제는 어제에 남겨둔채, 오늘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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