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열사 50주기 추모문집
발간사
다시 민주주의 시대, 김상진열사가 위대한 조국의 민주주의 역사가 되고, 민주주의가 다시 김상진을 소환하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짧지만 굵은 생을 마치고 박정희 유신 정권에 항거 할복 의거한 지 50년 만에 세상은 여러 굴곡을 거쳐 재구성되고 있고, 열사의 지향이 이루어지는 중차대한 시점에 우리는 50년이라고 하는 시·공간을 재해 석하고 열사가 살았던 삶과 이후에 벌어진 민주의 여정에서 벌어진 일들 을 기록했습니다. 그동안 남겨진 자료들과 새로 발굴·채록된 이야기들 과 미래의 꿈을 모아서 김상진열사 의거50주년 추모문집을 발간합니다.
형님은 제게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역사’였습니다. 저는 79학번으로 김상진 열사를 직접 뵙지 못했습니다. 형님과의 첫 인연은 입학하던 해 에 관악캠퍼스 교양과정을 공부하던 중 어느 날 선배들을 따라 서울대 농대 수원캠퍼스에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4년 전, 1975년에 벌어진 ‘기가 막힌 역사’를 만났습니다. 할복 의거입니다. 떠꺼머리 촌놈이 대학에 들 어와 뭐가 뭔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시기에 접했던 ‘김상진의 생생한 스토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용기를 제게 주었습니다. 제 삶의 기대치를 한껏 높여주었습니다. 당신이 젊음을 토해내고 진리에 거처하며 울분을 토하며 산화한 그 자리에서 전 자라고 성장했고 고민해 왔습니다.
어떻게 청년·학생이 그 나이에 할복이란 방식으로 유신독재 정권에 항거할 수 있느냐 하는 준엄한 대의에 놀랐다기보다는 그것을 결정하고 기획하고 동시에 동료들을 다치지 않게 챙기고 배려하면서 그 일을 도모 한 주도면밀함에 놀란 것입니다. 더하여 이후의 상황까지 고려해 의거를 진행한 담대함에 두 번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이 역사가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살아오는 내내 그 역사는 새록새록 새겨졌습니다. ‘시대가 만 들어 옹골지게 맺힌 김상진’이 담긴 행동과 남겨진 글로 알아차리게 됩니 다. 그 여정에서 ‘양심선언문’은 제 삶결이 출렁일 때마다 ‘올바른방향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불의한 시대가 왔을 때 자신의 온몸을 던져서 그 세상에 항거하여 문 제를 풀고자 했던 죽음의 무게로 치면 김상진은 저 갑오년 동학의 전봉 준, 김개남의 죽음과 같고, 일제강점기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의 무게와 같습니다. 불합리한 시대가 왔고, 인권이 유린되는 참담함이 극에 달했 을 때 그에 저항해서 사람답게 살고자 자신의 목숨을 던졌던 죽음의 무 게로 보면, 김상진 열사는 1960년 4·19 혁명의 김주열 열사와 같고, 1970년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목숨을 걸었던 노동열사 전태일과 같고, 1980년 광주 5·18 민주항쟁의 윤상원 열사의 죽음과 맞닿아 있습 니다.
모두가 머뭇거리고 망설이고 있을 때 기꺼이 조국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헌신한 80년대 이후에 90년대를 넘어서 지금 까지 이어져 오는 민족·민주열사들의 그 죽음의 무게와 똑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김상진 열사를 늘 역사의 창고, 역사의 서고 한켠 에 꼽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만 가끔 한 번씩 꺼내 보고 다시 꼽아 두는 존재로 대하지 않았나 하는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유신정권 폭압의 1970년대를 이야기할 때 1970년 전태일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바로 1980년 광주항쟁으로 점프를 뛰곤 합니다. 영상으로 사물을 헤아리고 스토리로 세상을 구성하는 시대에 ‘1975년 김상진 열사 할복 의거’를 마냥마냥 역사 책장에 꽂아만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 습니다. 하여 김상진기념사업회는 민주 시민들과 함께 장편다큐멘터리 <1975·김상진>을 제작했습니다.
2019년 시작해 3년 반에 걸쳐 완성한 장편다큐멘터리 <1975·김상진> 감독으로 전국 상영회를 돌고, 김상진열사의거 5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장으로 일하면서 ‘김상진과 관련된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사와 같이 호흡했던 분들이 계실 때, 자료들이 사라지기 전에 어떤 방식이든지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겨 놓아야 할 의무감이 느껴져서입니 다. 그래야 ‘민주주의 역사’ 김상진의 콘텐츠를 후세대에서 디자인할 때 밑자료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잊지 못할 울림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김의장(원예 72) 선배가 따님에게 맡겨 50년간 보관해 오던 김상진 열사의 ‘양심선언문’ 현장 낭독 육성(4분) 원본 테이프를 기증해 주었습니다. 과연 될까말까
고민하면서 작업실로 가져와 카세트에 넣고 미디어 파일로 전환하려고 플레이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야호! 저도 모르게 아내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5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 최고의 선물이 주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악명 높은 수원비행장에서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음이 첫 두 문장을 덮어버리고 ‘어두움이 짙게 덥힌 저 사회의 음울한 공기를 헤치고…’로 시작하여 ‘우리가 해야 할 바를 명실상부하게’를 끝으로 학우들의 비명 소리까지 중간중간 비행기 소음을 포함해 4분간 김상진 형님의 육성이 들어 있었습니다.
멈칫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좀 주저하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소신이 명확하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차분하게 ‘양심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그렇게 상진 형님은 50년 만에 우리 곁으로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동시에 1973년, 칠레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육성이 생각 났습니다. 그날 왜 그랬는지 모든 게 자연스러웠습니다.
“내 조국의 노동자들이여, 나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배신이 난무하는 이 어둡고 쓰디쓴 순간을 다른 이들이 극복 해 낼 것입니다. 계속 나아가십시오. 머지않아 넓은 가로수 길들이 다시 열리고 자유로운 인간이 그곳을 걸으며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것임을 믿으며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 는 마지막 말이며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군에 맞서서 끝까지 항거하다 스스로 목숨을 던지며 국민들에게 남긴 아옌데 대통령의 라디오 육성과 박정희 유신정 권의 독재에 맞서 자신의 배를 칼로 갈라 조국의 민주를 위해 자신을 헌신했던 김상진 열사의 육성을 여러 번 번갈아 들었습니다. 두 분의 음성과 굳은 의지와 간절함은 어쩌면 이렇게 데칼코마니 같을까요.
제가 범접하지 못한 영역에 계셨던 분들이라 그런 면도 있고 또 하나 는 두 분의 삶결이 처음부터 이웃과 공동체와 나라를 위한 ‘담대한 본성’ 을 지녔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상진열사 50주년기념사업은 세 가지로 정립됩니다.
첫째, 서울대 관악캠퍼스 75동에 ‘김상진홀’이라 이름이 붙은 계단식 세미나실(52석 규모)이 생겼습니다. 그곳에서 공부하고 연구할 후배들에 게 김상진의 가호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둘째, 수원캠퍼스 할복 의거 현장에 ‘김상진 민주광장’이 조성되었습니 다. 대강당 앞 잔디밭에 열사에 대한 추모와 시민들의 휴식 및 일상 공간 이 서로 스며들게 설계했습니다. 콘셉트는 ‘디딤’입니다. 딛고 읽고 따르 다 보면 김상진에게 닿습니다.
셋째, 김상진열사 의거50주년 추모문집을 발간합니다.
이 책 1부에서는 김상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계승 사업에 대해서, 2부에서는 민주열사의 선구자 김상진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이야기합니 다. 3부에서는 김상진을 기리는 사람들의 다시점(多視點) 이야기를 수록 했고, 4부는 열사가 남긴 글 모음, 5부에는 지난 50년간 세상이 일구어낸 열사 관련 자료들이 들어 있습니다.
민주화운동 단체에서 자신의 기관지를 37년간이나 현재 진행으로 발 행·유지하는 조직은 보기 힘든데 1988년 결성된 김상진기념사업회는 그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그런 회원들의 지난 50년간의 활동 역량과 기록이 있었기에 열사의 좌우·전후에서 계셨던 동료들과 후배들의 ‘민 주적인 삶’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습니다. 또 열사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그를 추모하는 서울대 5·22 집회, 4·15 광주일고 집회, 4·15 서울대 공대 집회 참여자들과 일파만파 퍼져 나가 김상진을 따라 올곧게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도 꾸준하게 채록하고 촬영했습니다.
자료는 김상진 평전 <긴 겨울 얼음 뚫고>와 김상진기념사업회 기관지 <선구자>, 언론 게재 문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서울대 기록관 등 다양한 자료 체계에서 선별해 수록했습니다. 또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과정과 50주년기념사 업 추진위원회에서 새롭게 발굴, 채록된 콘텐츠와 미디어 자료들을 소신 껏 담았습니다. 하지만 곳곳에 부족한 부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또 김상진 스토리의 새로운 출발점이니 여러분들이 채워주시길 희망합니다.
역사를 기록하지 않으면, 역사를 반추하지 않으면, 역사를 공부하지 않으면, 내가 지나온 날을 아파하고 그걸 느끼지 못하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 또한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업이 마무리되기까지 전체 주필을 맡아주신 임영태 선생과 성공 회대 평화박물관 반헌법행위자열전 한홍구교수팀에게 감사드리고, 김상 진기념사업회 회원들과 함께해주신 민주시민들께 고마운 말씀을 드립니 다. 특히 한얼을 비롯하여 4대 이념서클과 서둔야학 회원들, 부산, 광주, 담양(한얼 인터뷰), 서울 인터뷰(육성 원본 기증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소중했지만 놓치고 지나갈 뻔했던 지난날들을 정리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원본 테이프를 정성스레 ‘건드리지 마 노타치’ 종 이로 싸서 50년간 보관하고 김상진기념사업회에 기증해주신 김의장 선배와 그 따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특히 5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서 수고해 주신 여러분들과 책을 만드느라 고생하신 도서출판 한모임 여러 분들께도 깊은 감사 말씀드립니다.
김상진 열사와 동시대를 살면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통렬하게 애 쓰시고 목숨까지 바친 분들이 계시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김상진열사 의거 50주년과 윤석열 내란 진압 투쟁으로 재구성되는 한국사의 현재와 미래가 서로 힘을 보태며 동시(同時)점을 지나고 있습니다. 다시 민주주의, 다시 김상진입니다. 50주년을 이렇게 맞이하고 마무리합니다. 김상진 이야기는 후세대들에게 이어질 것입니다.
윤석열 내란 진압 과정에서 표출한 청년 세대들의 ‘응원봉 혁명’, ‘거침 없는 의사 표현 세력’으로 떠오른 모습들을 환영하며 그들의 삶결에서 김상진 열사의 뜻과 지향이 함께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열사가 끝내 읽지 못하고 남겨둔 두 문장이 있습니다.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 없는 뜨거운 갈채를 보내겠다.”
김상진 열사의 뜨거운 갈채를 위하여!
<오랫동안, 김상진>
이 책을 김상진 열사에게 바칩니다.
김상진열사 만세!
2025년 4월 11일
안병권
김상진열사의거 5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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