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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에 깃들다

by 안병권

한 중년 부부가 귀촌했다. 지평선의 고장 죽산면소재지 앞마당과 붙어있는 죽산산자락 언덕에 운명처럼 마음이 끌려 비어있는 빈집을 보자마자 매입·계약했다. 파란색 양철지붕이고 그 아래에 70년대 얹은 것으로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이 얹혀져 있었다. 본채와 ‘니은’자로 슬레이트지붕 창고(돈사 및 화장실등 용도)가 골목길 따라 길게 자리잡고 있었다. 처음엔 다 헐고 새로 집을 지으려고 했다.


어느 날 천정을 뜯어보니 1906년(병오년)에 얹은 상량문이 보였다. 병오년, 병오년 하면서 동네 어른들께 물어보니 당신들 어릴 때도 옛날집이었다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1966년 병오년이 아니라 그보다 한바퀴 전 1906년도 상황이었다. 대들보며 서까래가 잘 보존되고 있었다. 지난 115년간의 이야기가 가득한 듯 보였다. 건물을 버리기 아까웠다. 리모델링하기로 결정했다.

빈집의 안방에는 2004년도 3월 달력이 걸려있었다.


집주인에게서 이 집을 짓게 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죽산에 한 아이가 살았고,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새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새엄마와의 갈등 끝에 그 아이는 가출했고 인천으로 흘러가 목재회사 사장으로 훌륭하게 성장했다. 먼 훗날 고향 죽산에 내려와 새어머니와 마음의 한을 풀고, 새어머니에게 효도선물로 지어 드린 집이었다.


2021년 5월 본채 리모델링 작업을 시작하고, 창고는 헐어내고 새로 지었다. 6개월여 걸린 대장정...

리모델링 한참 진행중인데 한집 건너 이웃 빈집이 또 한 채 눈에 띄였다. 그 집도 아예 살림집으로 쓸 요량으로 리모델링했다. 이 집도 지은지 30여년된 빈집이었다.

1차 리모델링 마치고 택호를 ‘죽산아이’라 이름지었다. 아내의 그림 작업실과 내 영상 및 글쓰기 이야기농업연구소 작업실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리모델링 다 마쳤는데

죽산아이 관련 민원이 들어왔다며 김제시청에서 출동했다. 1970년대에 전주인이 한옥 본채에 이어 내어 달아 창고 및 보일러실등 공간으로 쓰던 공간이 있다. 벽을 헐고 그 면적 그 모양 그대로 리모델링 했는데 건축법위반이라 벌금과 함께 철거명령이 떨어졌다. 담당 직원이 이야기했다. 민원이 없으면 그냥 그대로 가는건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벌금 납부하고 내어 단 신축 부분 다 헐어내고 다시 증축했다. 누가 민원을 넣었는지 모르지만 그때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새로 짓는데 건축비 들고, 철거하는데 비용 들고 다시 설계하고 허가받고 재건축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지나가는 일이다 싶었다. 이 여정 또한 우리 부부가 죽산에 스며드는 과정이었다.


마을입구 골목길 뚫어뻥


죽산면사무소 뒷길 죽산아이를 끼고 2차선 도로와 접한 골목길이 좁아 웬만한 소형 트럭도 지나갈 수가 없었다. 살림집 리모델링하는데 건축자재, 콘크리트 레미콘 작업 고생을 너무 많이했다. 이왕 여기서 살거면 저 골목길을 넓혀야지 마음먹었다. 다행히 우리가 구입한 땅 계약서를 보니 골목길 건너편에 골목길에 붙은 짜투리땅이 우리 명의여서 김제시청에 의사 타진했다. “이 땅을 시에 기부할테니 마을 골목길을 넓혀달라”

전격적으로 골목길 확장작업이 이루어졌다. 우리가 개비온 돌담을 쌓을 때 마당쪽으로 넓히고 기증한 땅을 포함 기존도로부지를 통합하니 꽤 너른 쾌적한 골목길이 완성 되었다. 마을로서는 몇십년만의 숙원사업이 이루어진 셈이다. 지금은 25톤 레미콘 차량도 죽산산을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든다.


동네딸


종종 아내는 반찬을 만들다가 누가 생각난 듯.. 한 접시 들고 밖으로 나간다. 동네에 나이드신 어머니들이 많이 산다. 홀로 사시고 편찮키도 하고... 반찬을 여며서 나눠 드린다. 시장에서 장보다가 맛나 보이는 과일이나 물품이 있으면 10여개 사서 동네 어른들 나눠드리기도 한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마을 분들과 그렇게 공감대와 인연을 이어간다. 하지만 죽산 인심은 여전했다. 시시때때 어른들은 농사지었다며 온갖 먹을거리 나눠 주신다. 덕분에 어지간한 것은 자급자족한다. 김장철에는 한 박스씩 가져다 주셨다. 김장이 끝날 시즌이면 김장김치가 7가지가 들어온다. 일곱빛깔 김치맛을 즐길 수 있다는거 행복한 일상이 아닐 수 없다.

음식을 나누고, 농산물을 나누다 보면 동네분들 개개별 상황이 확인된다. 그러면 그에 맞게 우리 부부는 그분들을 관계 맺는다. 요양병원에 가 계시면 시내 나간 길에 종종 찾아뵌다. 그런 몸짓 손짓으로 60대 초반의 아내는 자연스레 ‘동네딸’ 역할을 한다. 어른들이 대부분 80대 이상이시다.


그렇게 햇수로 5년이 되었다. 살림집과 죽산아이 앞마당과 언덕에 수국정원이 만들어졌고, 아내의 섬세한 관리로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제멋을 만끽하며 풍요롭게 살아간다.

몸 쓰는 일에 잼병이었던 나는 나대로 하나둘 일을 배웠다. 나무를 자르고 공구를 다루고, 칠하고 만들고, 무언가 보면 설계할 줄 알고... 나무나 꽃들, 작은 텃밭에서 작물들의 변화를 완전치는 않지만 오롯이 분별할 줄 알게 되었다.

골목길 오고가며 선한 이웃들과 자연스레 인사주고받고...


게스트하우스 죽산아이


그렇게 4년이 지났는데, 2024년, 지인들이 이 한옥을 공유주택 농가민박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햇다. 8월달에 전격적으로 시청에 허가를 득하여 ‘죽산아이’란 상호로 게스트하우스 시작했다. 에어비엔비에 등록하고.

1년 4개월이 지난 지금, 죽산아이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방문후기들이 좋아서 1년여동안 5백여명 정도가 인연을 맺었다. 사람들은 죽산아이 스토리와 아내의 작업실, 앞마당과 언덕 그리고 동네가 주는 매력에 마음을 건넨다.

조정래선생의 소설 ‘아리랑’ 의 중심무대인 죽산, 일제강점기 쌀수탈의 대명사 하시모토농장이 있는 동네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하다. 김제 너른 평야를 적시며 서해로 넘어가는 원평천과 동진강 유역을 따라 펼쳐진 대 자연의 서사 또한 흥미진진하다. 동학농민혁명과 소설 아리랑의 본무대가 펼쳐지는 죽산은 자연스럽게 우리 내외 인생에 스며들었고 우리는 죽산에 깃들었다.

‘이곳 저곳 꽃길,꽃밭’


처음에 사람들은 우리가 무모하다고 헛짓한다고 비아냥거렸다. 저런 집을 누가... 저렇게 돈을 들여? 그것도 두채씩이나....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판이 바뀌었다. 동네가 바뀐 것이다. 그리고 우리 내외 삶결도, 생각도, 태도도 ‘뱃속 편한 흥미로운 서사’로 진화하고 있다.

마을 어른들이 연세가 더 들어가면서 짓던 밭들을 우리보고 지어먹으라고 내어주신다. 그 흐름을 기반으로 마을을 ‘이곳저곳 꽃길,꽃밭’로 재구성해볼까 욕심 내고 구상중이다.

2025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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