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세이 프롤로그
사람들은 쉬고 싶을 때, 여행을 떠난다. 지쳤다는 생각이 들 때, 낯선 곳을 찾는다. 왜 집에서 쉬지 않고 굳이 새로운 곳으로 시간과 돈을 들여 떠나는 걸까? 여행의 묘미가 단지 사진 찍기와 자랑하기에만 있지는 않을 터인데.
몇 년 전, 김영하 작가는 알쓸신잡 3에서 사람들이 호캉스를 떠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호텔에는 우리 일상의 근심이 없다.” 뒤이어 그는 책에서 본 한 구절을 덧붙였다. “우리가 오래 살아온 공간에는 상처가 있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기억난다.
일상의 근심과 공간의 상처는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이 반응해서 생기는 걸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이 근심과 상처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재미와 관광을 위해서도 여행을 떠나지만, 말마따나 일상의 근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힐링이라고들 한다. 다녀오면 무엇이 회복되었길래 우리는 한결 건강해진 기분으로 돌아와 다음 여행을 또 기약하게 되는 걸까?
여행을 떠나 도착한 낯선 곳에서는 낯선 나를 발견하게 된다.
사실 ‘낯선’ 나는 있을 수 없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나만 존재할 뿐이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나는 평소에는 나에게 외면당하고 가려져 있다. 때로는 잔뜩 포장해서 내가 ‘인정하는’ 나로 억지로 분류해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부자연스러운 일은 늘 부담스러울 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힘이 들어가 내 에너지를 매일 일정량 소모하게끔 만든다.
그런데 낯선 곳에 도착한 순간, 나도 모르게 탁 고삐가 풀어진다. 답답했던 마스크를 벗어던지게 된다. 여행지에서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니 애쓸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신선한 공기와 풍경을 만끽하다 보면, 어느새 온전한 나로 되돌아온다. 내가 받아들이기 싫은 나의 못난 점은 여행하는 순간만큼은 감출 수 없이 튀어나오게 되고 평소와 달리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 낯선 환경이라는 핑곗거리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나-사실은 내가 외면했던 나-에 놀라게 되곤 하지만 유쾌하게 받아들여진다. 여행 중이기 때문에.
그렇게 인정하지 못했던 나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면서, 위안을 얻게 되고 힘이 난다. 불가피하게 소모되고 있던 에너지가 재충전하는데 쓰이기 때문이다.
여행에 다녀와서도 그런 ‘나’에 대한 수용은 알게 모르게 계속된다. 계속해서 일상 속에서 낯선 나에 대한 인정작업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다. 못난 나를 인정하는 바로 그 시작이 어려웠던 것이지, 한번 시동 건 일은 시나브로 진행된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은 내면세계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외면했던 나를 인정한 만큼 한결 가벼워진다. 그리고 더 떳떳해진다. 그렇게 힐링이 된다.
여행이 힐링인 이유는 김영하 작가가 말했던 일상의 근심을 낯선 곳에 하나, 둘 놓고 와서 이기 때문 아닐까? 근심의 크기와 가짓수는 내가 수용하지 못하는 그 무언가와 비례하고, 힐링의 크기 또한 내가 내려놓고 받아들인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코로나 이후 몇 년 만에 예전의 일상으로 거의 돌아온 요즘, 다시 여행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앞으로 해외든 국내든, 길든 짧든 재충전의 시간을 종종 가져볼 생각이다.
먼 곳에서 발견하는 가장 가까운 나. 일상의 근심이 없는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새로운 나. 앞으로 떠나게 될 길고 짧은 여행 속에서 더 자주, 더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글을 통해 내가 느낀 바를 더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처음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었던 그때의 초심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