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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영 Dec 29. 2023

유럽이나 한국이나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직장에서의 부조리에 대하여



직장 동료들과 단체로 연극 공연을 관람한단다.


네덜란드 직장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부서에서 단체로 무슨 연극 공연을 관람할 예정인데 참여할 건지 결정하라고 한다. 'Mindlab'라는 연극이었다. 네덜란드 대학(University of Twente, Utrecht University)의 교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TheaterMakers Radio Kootwijk이라는 단체에서 만든 연극이다. 연극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바탕으로 한 "science fiction thriller"라고 강조한다.


Mindlab goes to the very heart of science and academia and deals with fact-finding, value and truthfulness within the institution of 'the university'.


간단히 말하면, 학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대체로 나쁜 일들을 현실적으로 그려내서 구성원들로 하여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연극 공연이다. 궁극적으로 직장 내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 목적이 있다. 대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학적 진실, 리더십, 사회적 안전성, 연구와 교육 사이의 균형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같은 학과 구성원(박사과정, 포닥 연구원, 교수, 행정 직원)들이 같은 날짜에 같이 참여하는 형식이다. 단체로 관람한 후에는 단과대학/학과별로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다.





나르시시스트들이 모인 대학?


트레일러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좀 난해하다.


You are not who you think you are. You are what you do.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일 그 자체이다.


연극 공연의 일부 장면 (Source: University of Utrecht)

이미지 출처:

https://www.uu.nl/en/organisation/mindlab-a-theatre-performance-that-touches-at-the-heart-of-science-and-academia



주인공인 아저씨가 나온다. 이 사람은 이룬 것이 많은, 나이가 꽤 있는 대학 교수이다. 독백과 대화를 오가며 극적인 상황이 연출되며 분위기가 고조되다가 빨간 버튼을 누르며 현실로 돌아오는 패턴이 극 내내 반복된다. 공연 자체는 네덜란드어로 진행되고, 영어로 된 자막이 나온다.


연극에서 다룬 주요 주제는 다음과 같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

외국인과 여성 교직원에 대한 차별

Teaching(강의)보다 research(연구)와 그 실적을 중요시하는 학내 분위기


시간이 좀 지나 디테일은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성폭력에 관한 스토리는 외국 국적의 여자 박사과정생이 지도교수에게 성폭력을 당해 학업을 관두고 학교를 나가게 되는 내용이다. 네덜란드라고 이런 일이 없겠느냐만은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좋은 교수와 직원도 많겠지만, 네덜란드 교직원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해서 만든 줄거리가 이렇다니 이런 일이 없진 않겠구나 싶었다.


차별에 관한 내용은 중동 국적의 여자 교원이 대학 내 차별을 겪다가 퇴사하고, 나중에 연구하던 분야에서 대단한 인물이 되어 타임즈 같은 잡지 표지에 실리게 된 것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식으로 꽤 오랫동안 연극이 진행되었다.


공연의 마무리가 꽤나 인상 깊었다. 요정(?)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 주요 가사는


We are narcissists!

                                                        우리는 나르시시스트다!


연극의 주요 인물, 즉 교수를 풍자하는 의미로 나르시시스트라는 말을 사용하여 초록색 타이즈를 입은 요정들이 춤도 추고 굉장히 밝은 노래를 부르며 한참 동안 무대를 돌아다닌다.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인물을 표현할 단어가 없었는데, 나르시시스트가 딱이었다.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랄까. 심지어 그 대상이 같이 있는 공간에서 이 가사가 반복되는 노래를 들으니 정말이지 너무 웃겼다.





토론 시간에 나온 실제 사례들


공연이 다 끝난 후,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 토론 시간을 가졌다. 토론 시간에는 조별로 앉아서 연극 공연을 보고 느낀 점을 나누었다. 연극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픽션이라면, 토론 시간에 나오는 얘기는 실화인 것이다.


우리 테이블에는 행정 직원으로 일하는 분도 같이 앉았다. 그분은 교수와 행정 직원 사이의 차별에 관해 얘기했다. 교수들이 더 중요하고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봤을 땐 다들 직원에게 friendly 하게, 격 없이 대한다고 느껴졌는데, 그런 고충이 있구나 싶었다.


한 교원은 승진 장벽에 대해 털어놓았다. 유럽 국적이지만 네덜란드 국적은 아닌 여성 교원이었다. 승진해야 되는 시점에 놓여있었는데, 더 높은 직급의 다른 여성 교원에게 "애초에 너를 다음 직급으로 승진시켜 줄 생각 없이 채용했다."는 발언을 들었다고 한다. 임용 체계에 따라 성과 평가를 거쳐 승진하는 것이 아닌가? 저분 마음고생 심하겠다 생각했다.


나르시시스트 노래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한 교원은 분명 나르시시스트들이 같은 단과대학에도 존재한다고 밝혔다. 물론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다. 학술적으로 다른 연구 방법을 선택하고, 다른 타겟 학술지에 논문을 출판하는 것에 대한 존중이 없고 그걸 티를 내는 사람들을 겪어봤다고 했다. 가장 인정받는 탑 저널에 출판하는 것을 뽐내는 데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분명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깊게 단과대학에 관여되어 있지 않았고, 내 프로젝트 위주로 움직여서 이런 걸 알아챌 일이 없었다. 게다가 재택근무가 활발하던 시기라 대다수의 동료들을 만나보지도 못했다. 더 오래, 깊게 지내보면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이겠다 생각했다.


한편, 나이가 지긋한 교원은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런 일들이 실제로 있었다고 하니 이해는 하지만, 본인은 비슷한 일을 주변에서 전혀 목격하지도, 직접 겪어보지도 못했다고 그렇게 큰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계속 얘기를 이어갔는데, 실례를 나눈 교원은 그때부터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교원 간 법적인 분쟁까지 갈만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구체적인 얘기는 당사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줘야 하는 이유로 듣지 못했지만 아직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각 조는 전지에 앞으로 조직이 나아갔으면 하는 방향에 대해 적어 발표하였다. 박사과정생으로 구성된 그룹도 거침없이 다양한 직급의 교수님들 앞에서 불만사항과 바라는 점에 대해 발표하였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나는 해외 거주 경험, 여행 경험은 꽤 있지만 해외에서 풀타임으로 특정 직장에 소속되어 일하는 건 처음이었다. 여행하는 것과 살면서 일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유럽 생활의 속속들이를 알지 못했을 때에는 유럽에 대해 ‘워라밸이 좋은 나라.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고, 휴가도 충분히 쓸 수 있는 나라. 복지가 잘 되어 있고 애 키우기 좋은 나라’라고만 생각했다. 물론 이건 다 맞는 말이다.


교육 체계, 직장 환경, 복지 제도 등 선진화된 것은 분명 맞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직장생활도 평등하고 합리적일 거라 짐작했다. 그런데,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가. 이상한 사람들은 어딜 가나 있고, 그게 나일 수도,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해외 직장에서도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


희망적인 것은 이런 사회적 문제에 대해 화두를 던지고, 구성원끼리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개선이 되는지 여부는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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