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의 순기능
나는 내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렇기에 일할 때에도 업무의 내용이나 업무 방식에 개선할 점이 있으면 같이 일하는 상사, 선후배의 의견을 듣고 반영하려고 한다. 그러나 네덜란드 직장의 상사가 제기하는 이슈의 상당한 부분은 내 상식선에서는 수용 불가능한 것이었다. 수용 불가능한 것 중 업무와 관련된 내용의 비중은 낮았다. 또는 업무에 대한 내용과 지극히 사적인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있는 것을 나에게 토로하였다. 이게 상당히 골 때리는 부분이다.
왜 내가 이런 것까지 들어주고 있어야 하지?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우리가 그럴 관계인가? 나를 향한 본인의 개인적 감정에 대해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알아서 해결해야 할 것이고, 업무상 개선하고 논의할 부분에 대해서는 내 의견을 충분히 전달했으니 책임자인 본인이 정리해서 회의를 하던가 확실한 방향성을 제시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다른 동료도 프로젝트로 엮여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 역할이 있는 사람이 나의 말 한마디 작은 행동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모아서 나에게 배설하고, 대안이나 해결방안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쩌자고?"란 생각만 남았다.
상대방은 매번 본인만의 세상 속에 일어난 감정의 소용돌이로 인해 무언가를 호소할 것이고, 나는 해소 방안을 제시할 것이고, 그 순간에는 납득하는 듯해 보이겠지만 또다시 소용돌이에 빠질 것이며,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고 놔두고, 나한테 섭섭하게 생각하든 말든,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난 내 할 일 하며 '통제할 수 없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이 악순환에서 탈출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네덜란드에서 난생처음 공황장애 증상을 겪게 되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나를 도와줄 가족과 친구가 곁에 없다는 것
증세가 언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불안함, 증세가 나타났을 때 죽음에 이를 것 같은 공포감
크게 이 두 가지였다.
내 주변에는 공황장애를 겪은 사람이 없다. 공황에 대해 물어볼 데도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 직장에서 연결해 준 상담사와 상담을 진행했지만, 일상 속에서 증상이 발현될 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특이한 점은 오히려 갈등 상황에서는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고,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뜬금없이 집에 가만히 있을 때 갑작스럽게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다행히 공황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전에도 증상을 완화하는 호흡법을 시도해 봤고 효과도 보았다. '닥터지하고' 유튜브 채널에 게시된 Dr Dihmes의 Peace breathing 복식호흡과 명상이라는 영상을 보고 따라 해봤다. 엄마의 추천으로 알게 된 영상이다.
숨 쉬는 게 힘들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면 하던 일을 바로 멈추고,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영상을 틀어놓고 호흡법을 따라 했다. '숨 쉬는 게 무슨 효과가 있겠어' 싶기도 했고, 가만히 누워 따라 하는 게 귀찮기도 했다. 그래도 속는 셈치고, 다른 방법이 없으니 영상 속 선생님의 카운트에 따라 호흡을 했다. Dihmes 박사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서 듣고만 있어도 안정감이 느껴진다. 호흡법을 따라 하다 보면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잠도 솔솔 온다.
꼭 공황장애가 아니더라도 안정이 필요하거나 잠에 쉽게 들기 힘들다면, 이 호흡법 영상을 눈 딱 감고 한 번만 따라 해보길 강력 추천한다.
공황의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이후에는 유튜브에 공황장애에 대해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유튜브에 검색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닥터프렌즈' 채널에 게시된 공황장애 초기 증상과 대처법은!?(Symptoms of Panic Disorder)이라는 짧은 영상을 본 후 예상밖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영상에서 의사 선생님들이 말해주는 공황장애의 증상은
갑자기 시작되는 가슴 두근거림
죽을 것 같은 공포감
숨 쉬기 곤란함 등이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생기는 것
내가 겪은 것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광장 공포증이 동반되거나 우울증이 겹치는 경우 등은 예후가 좋지 않다고 한다. 다행히 나는 영상에서 말하는 예후가 안 좋은 경우에 해당하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나처럼 몇 분 내에 증상이 완화된다고 한다. 그래서 놀라서 응급실에 가는 길에 괜찮아진다고 한다. 나도 오스트리아 응급실에 도착하기도 전, 아니 택시를 타기 전에 사실 증상은 다 사라진 상태였다.
영상에서는 공황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도 알려준다. 눈앞에 있는 세 가지(시각, 소리, 촉감)에 집중하는 '그라운딩 기술'을 적용하라고 한다. 그 사이에 심호흡을 하면 좀 나아질 거라고 한다. 내가 하는 호흡법이 도움이 되는 거였구나.
이 영상에서 제일 도움이 된 말은
공황장애는 죽는 병이 아니에요.
겪어본 사람은 알 테지만 과장하는 게 아니라 멀쩡히 있던 와중에 순식간에 증상이 몰려오면서 정말로 숨을 못 쉬어서 당장 몇 초 뒤, 몇 분 뒤에 죽음에 이를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증상을 겪어도 죽지 않는다니. 이건 죽을병이 아니구나. 전문가의 입을 통해 들으니 마음이 확 놓였다. 왜 진작 의사 유튜브를 찾아볼 생각을 안 했을까.
영상을 시청한 이후에도 몇 번 더 증상을 겪었는데 배운 대로 그라운딩 기술을 적용해 봤다. 나는 원래 발표하는 것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내 발표 순서를 앞두고 있는데 숨 쉬는 게 힘들어졌다. 발표 차례가 되어 앞에 나가면 주저앉을 것 같은 상태였다. 심호흡을 좀 했는데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라운딩 기술이 떠올라 그 방 안에 있는 화분이나 시계 같이 눈에 보이는 물건 세 가지를 찍어놓고, 돌아가며 응시하면서 심호흡을 지속했다.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15분 정도 지나니 괜찮아졌고 내 발표는 아무 탈 없이 마칠 수 있었다.
유튜브에 올라온 재밌는 영상을 시청하는 게 내 네덜란드 일상의 활력소이기도 했는데, 유튜브는 공황장애 진단과 극복에도 도움이 된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증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박서희 정신과의사' 채널의 갑작스런 불안과 공포! 공황장애가 아닌 다른 질환? 진짜/가짜 구분법 총정리! 영상을 참고해도 좋겠다.
공황장애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고, 새해에는 정신도 몸도 건강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