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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픽션 Feb 10. 2023

로마 - 나의 유모에게

페미니즘으로 영화읽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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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어떻게 자전적 영화의 주인공을 원주민 유모로 설정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감독의 자전적 작품이라는 것만 알고 영화를 감상하던 나는, 현관을 청소하는 롱 테이크 오프닝에 이어 계속 그녀를 좇는 카메라에 놀랐다. 어린 쿠아론은 어딨나? 아직 앳된 느낌이 가시지 않은 채 대저택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저 여자는 누군가?  그녀의 이름은 클레오. 아이 넷을 키우는 부르주아 가정의 유모이자 입주가정부이다. 그녀는 주인 가족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집 안을 청소하고 차를 내 온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어린 시절 자신의 보모였던 '리보 로드리게즈'를 모델로 해 클레오란 주인공을 창조했다. 영화에서 그는 자신이 9살에서 10살로 넘어가던 무렵 집 안의 풍경과 분위기, 일어났던 사건들을 모두 클레오의 시점으로 그려낸다.


 자전적 작품을 만들며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한다는 건 윤리적 상상력과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자신의 과거를 다른 사람의 눈으로 기억하겠다는 것이고, 자신의 생각, 감정보다 당시 그 사람이 느꼈을 것들에 더 가치를 두고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세상을 지각하고 감각하고 표상하는 주체로서의 위치를 양보하는 것. 이건 자기 세계의 중심을 타인에게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알폰소 쿠아론은 자신이 주인공일 수 있는 이야기에서 그 자리를 유모에게 양보하고 엑스트라가 된다. 



세상의 중심이 바뀐 탓에 영화는 계급적 긴장으로 가득하다. 서구 백인 남성이 만든 다른 영화에서라면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것을 불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주인공이 원주민 여성 가정부이기 때문이다. 중산층 백인 가정에서 자란 어느 남자아이에게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족을 떠난 것만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상처였겠지만, 이때 그의 가장 가까운 곳을 지켰던 원주민 유모에게는 그가 상상할 수도 없는 더 큰 상처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상처들은 그것을 뒤늦게라도 인지하고 알아가려고 한 감독의 시도에 의해 우리에게 드러난다.  


 이 영화는 누구의 기억일까? 많은 부분이 유모 리보의 기억을 통해 쿠아론이 회상한 어린 시절의 가족과 멕시코시티 로마거리의 기억일 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그녀가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최대한 상상해 보려 한다. 내가 어린 시절 집의 불을 다 켜 놓고 잠들었을 때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집을 돌아다니며 그 불을 껐을지, 우리 가족이 모여 앉아 티비를 볼 때 옆에 조그리고 앉아 같이 티비를 보던 그녀가 차를 내오라는 어머니의 명령에 어떤 마음으로 거실을 나섰을 지, 그리고 주방에서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그리고 휴일에 그녀가 집을 떠나 시내에 나가 어떤 경험들을 했을지. 이 영화를 만드는 건 어린 쿠아론이 자기 중심적으로 기억했던 과거를 리보의 입장에서 돌이키고 그녀의 심정을 함께 느끼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클레오의 개인적인 삶만을 중심에 두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클레오가 아니라 멕시코시티의 한 구역의 이름인 '로마'이다. 쿠아론 감독은 70-71년 당시 멕시코의 로마를 객관적인 풍경으로 담으려 노력한다.  이 작품은 리보와 쿠아론 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가족들, 그의 집, 그리고 70-71년도의 멕시코 로마 거리의 기억이다. 그리고 그 당시를 재현한 공간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하며 느꼈던 기억, 그것을 깊은 심도로 바라보며 기록한 카메라의 기억이기도 하다. 이 기억들은 각각 복수로 존재하며 뒤섞이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런 영화적 시간과 기억에 대한 감독의 사유는 그의 어린 시절의 반영인 듯한 집 안의 막내 '페페'의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잠자리에서 막 일어난 페페는 자신에게 아침을 차려 주는 클레오에게 말한다. '내가 늙었을 때 클레오도 있었는데 클레오는 다른 사람이었어.' 클레오가 '네가 앞으로 늙으면 말이지?' 라고 묻자 페페는 부정한다. '아니, 내가 할아버지였을 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파일럿이었어.' '파일럿?' '응. 전투기 조종사.' '좋았어?'  '아니 무서웠어.' 


 페페의 말엔 영화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 그리고 잠재적 시간이 뒤섞여 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시점에  꼬마였던 알폰소 쿠아론은 늙어서 할아버지가 되었으며, 어린 시절의 유모 '리보'가 아닌 그녀를 연기하는 '클레오'와 함께 있다. 이 사건은 쿠아론의 과거에 비춰서는 미래이지만, 꼬마 페페를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 시점에서는 현재이다. 그런데 왜 페페는 자신이 꿈 속에서 할아버지가 된 것을 과거라고 하는 걸까? 영화는 여기에 잠재태로서의 미래라는 시간의 한 축을 덧붙인다. 쿠아론 감독의 어릴 적 꿈은 실제로 꼬마 페페와 마찬가지로 파일럿, 또는 우주비행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라서 영화 감독이 되었다. 감독은 영화 속 페페의 꿈 안에서 자신이 될 수도 있었던 한 가능성으로서의 미래를 심어 놓은 것이다. 페페는 영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 그리고 가능한 미래의 세계를 각각 독립적 세계로 놓고 그 사이를 나비처럼 날아다니며 호접몽을 꾸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이 세 개의 시간은 영화 안에 공존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극 중 인물들이 극장에 가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이때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 하나는 전투 비행사가 나오는 영화 이며, 다른 하나는 우주 비행사 영화다. 이는 어린 쿠아론이 꿈 꿨던 두 가지 직업이다. 전투 비행사 영화를 보는 건 클레오인데, 이때 클레오는 남자친구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가 영화를 보던 중간에 남자가 자신을 버리고 달아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전투 비행사였던 꿈에 대한 꼬마 페페의 부정적인 감정이 클레오의 비극적 경험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해변 가에서 어린 페페가 할아버지였을 때 파도에 휩쓸려 죽었다는 꿈을 이야기할 때 불길한 전조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얕은 곳에서만 놀겠다고 했던 파코와 소피가 보이질 않는지 클레오는 자꾸만 해변을 바라보다가, 결국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서둘러 해변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수영을 못 하는 클레오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되고도 숭고한 순간이다. 카메라는 밀려오는 파도와 그것에 맞서 힘겹게 나아가는 클레오를 역광에 롱 테이크로 비추는데, 이 지속되는 시간 속에 영화 내내 드리워졌던 죽음의 이미지 - 사산된 아이, 박제된 동물, 불타는 숲, 페페의 꿈 등- 와 일말의 희망처럼 비추는 석양의 이미지, 그리고 생명으로서의 물의 이미지가 팽팽히 맞선다. 기적적으로 클레오는 아이 둘을 무사히 구한다. 페페는 하나의 비극적 가능성을 꿈에서 꾼 거고, 클레오는 그 가능성에 맞서 미래를 바꾸어 낸 것이다.



*


 영화는 수미 상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첫 쇼트에서 타일 바닥에 물이 뿌려지고, 그때 바닥에 고인 물에 천장이 반사된다. 천장은 뚫려 있어 하늘을 비추고 그 네모난 스크린 속으로 비행기가 지나간다. 바닥을 닦는 물이 파도처럼 거품을 내며 밀려 왔다 쓸려 나가고 또 밀려 왔다 쓸려 나가지만 스크린은 여전히 하늘을 비추고 있다. 반영, 비추는 것으로서의 카메라. 영화는 바닥에 고인 물에 반사된 하늘처럼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닿을 수 없는 어떤 것을 비춰내겠다는 것 처럼 보인다. 시종일관 지상에서 수평으로만 움직이던 카메라는 마지막 쇼트에서 빨래를 널러 옥상으로 오르는 클레오를 향해 위로 틸팅한다. 이 각도가 한 사람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클레오를 올려다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표한 자세로. 클레오는 가장 카메라의 시야를 넘어 더 높은 하늘로 갔다. 그곳은 카메라가 닿을 수 없는 공간, 클레오의 삶의 공간이다. 그리고 비행기가 지나간다. 



 나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로마>의 주인공을 자신의 보모였던 '리보'로 설정한 것이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존중과 헌사라고 생각한다. 몇몇 리뷰를 보니 이 영화에서 드러난 계급적 긴장 때문에 왜 클레오가 주인 가족에게 저항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지 않았는지, 왜 클레오는 아이들을 구한 후에도 가정부로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불편함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어떤 지점이 불편한 걸까? 그토록 인격적으로 훌륭한 그녀, 아이들의 목숨을 구하기까지 한 그녀가 가정부이고, 앞으로도 어떤 계급 상승의 기회도 없이 평생 주인 집의 가사노동을 하며 살 거라는 사실이 불편한 걸까? 원주민으로서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시위를 하지 않고 백인 집에서 일하는 것이?


하지만 그건 그녀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고, 세상의 현실이다. 세상엔 아주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삶을 존엄하게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클레오 뿐만 아니라, 수 많은 가정부, 청소부, 미싱사, 용접공들이 존엄하게 평생 자신의 삶을 살아가곤 한다. 


  영화를 다 본 후에도 클레오의 계급적 위치에 불편해 하며 감독의 저의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사실 자신이 영화를 보며 그녀에게 이입했기 때문에 그 신분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 게 아닐까? 이 영화에 불편함을 느낀다면 평소에 유색 인종 가정부와 하인들이 엑스트라로 나오는 무수한 할리우드 영화들은 어떻게 봤을까. 아마 주인공 백인 남성에게 이입한 채 그들의 존재를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바로 그 엑스트라가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의 입장에서 세상을 표상하기에 모든 것이 너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때문에 클레오가 자기만의 삶을 살고, 혁명을 하고 등등을 바라지만 그건 번지수를 단단히 잘못 짚은 것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그저 그 곳에서 삶을 버텨나가는 사람의 존엄을 비추는 데 있다. 그 사람의 시선으로 시대를 돌아보고 기억하게 하는 데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게 지금 서구 식민 주체 백인 남성 예술가가 식민지의 원주민, 유색인종, 여성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중심을 넘겨주는 것. 세상을 표상할 권리를 넘겨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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