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렇게 이 영화에 매료되었나? 일반적인 감상자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평할 수 없다. 우아하고 절제된 뱀파이어 은유,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미장센,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는 신화적 상징들, 집에 갇혀있는 사춘기 소녀의 복잡미묘한 심리, 작품 내내 흐르는 섹슈얼한 긴장감,여성주의적 결말...오프닝 시퀀스부터 시작해서 엔딩 크레딧이 흐를 때 까지, 이 모든 요소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1. <박쥐>에서 이어지는 뱀파이어 모티브
흡혈장면이 나오지 않을 뿐 이 영화는 전형적인 뱀파이어 장르의 서사를 따르고 있다.
초인적인 힘과 매력을 지닌 뱀파이어와 성적인 긴장 상태에 놓여있던 인간이 그에게 먹히는 동시에 피를 수혈받고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박찬욱은 인터뷰에서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 가문의 이름이기도 한 '스토커'를 뱀파이어 문학의 창시자인 '브램 스토커'에게서 따온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이는 박찬욱이 전작 '박쥐'에서 차용했던 뱀파이어 모티브를 이어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나는 '스토커'를 박찬욱 감독의 전작 '박쥐'를 태주의 시점에서 재구성한 이야기라고 보았다.
사랑의 대상인 태주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이끌었던 죄의식적 남성주체인 상현이 아닌, 상현에게서 피를 수혈받고 새롭게 깨어난 여성인 태주의 시점에서 구성된 이야기. 성, 또는 감옥에 갇힌 공주를 구해내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갇혀있던 공주의 시점에서 구성된 이야기.
박찬욱 감독의 전작인 박쥐는 감독이 갖고 있는 역량에 비해선 많이 실망스러웠던, 아무리 좋게 봐줘도 범작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결점 많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잘못된 주인공 설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박쥐'에서 가장 강렬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는 주인공인 상현이 아니라 태주이다. 선과악, 인간과 짐승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상현과 달리 그녀에겐 죄의식이 없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능력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힘으로 인해 누릴 수 있게 된 자유를 한껏 만끽한다. 태주가 뱀파이어로 다시 부활하는 순간부터 스토리는 통제력을 잃고 그녀의 거침없는 에너지에 온통 휘둘리고 만다. 전반부에서 차곡차곡 쌓아왔던 죄의식에 대한 서사는 그녀의 천진하게 빛을 발하는 파괴적인 에너지 앞에서 빛을 바랜 채 허울만 남게 된다. 감독은 결말에서 그녀를 주인공의 손에 의해 응징함으로써 원래 있어야 할 마땅한 자리로 돌려보내지만, 그럼에도 이는 영 석연찮은 결말이다. 중반 이후로 내내 상현을 압도했던 태주의 죽음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 - 그리스 비극에서 윤리적으로 마땅한 결말을 이끌기 위해 끌여들었던 기계장치의 신이 개입한 결과로밖에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박쥐>에서 박찬욱 감독이 저질렀던 실수가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를 만들었던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라기엔 너무도 어설픈 동시에, 나름대로 인정받은 작가주의 감독이 자기 세계에만 빠져 관객과 소통할 길을 잃은 것 처럼 보였기에 나는 이후로 박찬욱 감독의 작품을 보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얼마 전 우연히 <스토커>를 보게 되었고, 이걸 보고 나서 박찬욱이 왜 <박쥐>에서 그런 실수를 저지를 수 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박쥐>는 감독이 <스토커>로 나아가기 위해서 거쳐야만 했던 과도기적인 작품이었다. 스토리의 초반을 사로잡고 있던 주제인 윤리적 남성 주체-상현-에서 탈피하여 선악의 피안에 존재하는 여성주체-태주-로 이르기 위해서 박찬욱은 <박쥐> 안에서 이질된 두 가지 세계를 억지로 꿰 맞출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쥐>의 중후반부는 선악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예술적 주체의 욕망과 에너지로 가득하지만 결코 그 선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만다. 전반부에서 주어진 죄의식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태주를 주인공으로 설정했으면 간단하게 해결되었을 문제이지만 박찬욱은 그러지 못했다. 왜일까? 박쥐의 원작인 테레즈 라캥의 주인공도 테레즈-태주-였다는 점에서, 감독이 <박쥐>의 주인공을 굳이 테레즈의 불륜 상대인 로랑 -상현-으로 삼은 이유는 그가 아직 테레즈에게 완전한 이입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있었다는 것으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남성 주체였고, 그래서 로랑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박쥐>의 마지막에서 소멸한 것은 태주가 아닌 '상현'이다. 그리고 태주는 <스토커>에서 다시 부활했다. 왜냐면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성에 갇힌 사춘기 소녀의 성장담, 뱀파이어 세례식.
스토커는 성에 갇힌 소녀의 성장담이자 우아한 뱀파이어 영화다.
전작 <박쥐>에서 노골적으로 재현되었던 뱀파이어의 형상은 절제된 채 은유적으로만 등장하며, 선과 악 사이에서 충돌하며 갈팡질팡 했던 주제는 '동족에게 피를 수혈하는 뱀파이어의 세례식' 이란 클래식한 모티브로 단순화되어 영화 전체에 걸쳐 호소력 짙게 드러난다.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영상이 어지럽고 공허하게 나열되었던 <박쥐>와 달리 이 영화에선 송곳니를 꽂지 않고 흡혈을 하며, 옷을 벗지 않고 성교를 하고, 온갖 함축적인 상징들로 주제를 구현한다.
인디아 스토커는 성에 갇힌 소녀이다. 그녀가 사는 저택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숲 속에 있는,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대저택이고, 갇혀 있는 그녀의 형상은 영화 내내 반복되는 '알'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그녀는 사춘기 소녀답게 무력감과 나른함, 짜증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다. 모든 소녀들은 알 - 집, 감옥-에 갇혀 있다. 소녀들은 현실에 불만족을 느끼지만 아직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욕구불만을 느끼지만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어떻게 해야 그 욕구를 채울 수 있을 지를 모른다.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길 꿈꾸지만 부모의 품을 벗어나서 살아갈 방법이 없다. 소녀들은 그렇게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럽고, 반항적이면서도 무력하다.
전통적인 서사에서 탑에 갇힌 공주님은 왕자에 의해 구출된다. 부모에게 버려진 채 한복집에 갇혀 온갖 구박을 먹고 자란 태주를 신부 상현이 구출해 주었듯이, 유일하게 믿고 따르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마음이 맞지 않는 어머니 밑에서 신경전을 벌이던 인디아를 구출해 주러 온 사람은 삼촌인 찰리다. 찰리는 여러모로 뱀파이어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그는 잘생기고 섹시한 미모와 사람들을 유혹하는 화술을 지녔다. 무엇보다 그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두 번의 장면에서, 감독은 고의적으로 엉클 찰리가 음식에 손을 전혀 대지 않았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그는 오직 핏빛 와인만을 마시는데, 이 와인의 생산연도는 인디아가 태어난 해와 같다. 그리고 처음으로 단 둘이 남은 자리에서, 찰리는 인디아에게 와인을 권한다. 이때 카메라는 머리색과 눈색이 같은 이들의 외모를 번갈아 비추며 같은 피를 나눈 친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찰리의 말에 인디아는 그럴 필요 없다고 날카롭게 쏘아붙인 뒤 한 마디를 덧붙인다. '우리는 이미 가족이니까요.' 그들은 말 그대로 피를 나누어마신 사이인 것이다.
영화는 색에도 큰 상징을 부여하는데, 인디아와 찰리의 색은 노란색이다. 광기와 미성숙의 의미가 있는 노란색은 인디아의 침대머리판, 찰리가 건네는 우산, 찰리가 입은 스웨터, 인디아의 학교버스와 연필 등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빨강은 성숙의 의미로 사용된다. 아직 소녀인 인디아와 대조적으로 성숙한 여성임이 강조되는 어머니 이블린의 방은 온통 빨강색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찰리가 인디아에게 선물해 주는 구두는 빨간 뱀가죽 하이힐이다. 이런 색의 상징은 인디아가 처음으로 공격성을 보일 때도 반복되어 드러난다. 자신을 괴롭히던 남학생의 주먹을 찌른 인디아의 노란 연필의 심엔 빨간 피가 드러나는데, 이는 성숙한 여성으로 나아가는 인디아를 의미하는 동시에 희생자를 흡혈한 뒤 피를 묻힌 뱀파이어의 송곳니를 떠오르게 한다.
태주에게 빠져 단기간에 격정적인 관계를 맺었던 상현과 달리, 삼촌은 오랜 시간동안 인디아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가 스스로 자각하기를 기다린다. 그는 인디아의 식욕, 성욕, 그리고 뱀파이어로서의 욕구(인디아 가문의 핏줄이 지닌 욕구)를 자각시키는 촉매로 충실히 기능한다. 그는 스테이크를 조리하여 인디아의 식욕을 돋구고 피아노를 치며 인디아에게 성적인 오르가즘을 느끼게 하며 숲 속에서 위험에 처한 인디아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도움으로써 그녀가 자신 안에 억누르고 있던 본능을 깨닫게 한다. 처음엔 그를 경계하던 인디아도 서서히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되며, 그녀의 경계심은 아버지의 책상 서랍 속에서 자신이 어렸을 때 부터 끊이지 않고 보냈던 삼촌의 편지를 발견하면서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그녀는 엉클 찰리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 존재가 아닌, 어렸을 때 부터 자신을 기다려왔던, 내가 누구인지 가장 잘 알고 있고 나를 다음 단계로 이끌어줄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찰리와 인디아는 이로써 서로가 같은 종족임을 확인하는 피의 세례식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3.엘렉트라 신화의 전복
박찬욱이 영화에서 그려내는 인물들이나 주제는 현실적이라기 보다는 (서양)신화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이다.< 올드보이>의 마지막 반전이 원작만화에서는 지극히 실존적인 문제였는데 반해 영화에서는 '근친'이라는 서양적인 코드로 변형되었던 것 처럼 그는 여러 작품에서 서양의 신화를 변주한다. <스토커>에서도 그런 면은 여지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아버지와 친한 관계에 있었고 어머니를 증오하는 인디아는 프로이트가 말한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전형적인 예시처럼 보인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대응으로 제시되는 엘렉트라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살해한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여서 복수한 딸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남자아이는 성장기에 아버지를 질투하고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보이고, 여자아이는 아버지를 욕망하고 어머니를 질투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보인다. 친하게 지내던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가 죽은 날 집안에 들어온,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닮은 삼촌 찰리. 그런 삼촌을 욕망하는 엄마 이블린. 그런 엄마를 증오하는 딸 인디아. 전형적인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구현이다.
그러나 박찬욱은 프로이트의 남근중심주의적 정신분석학을 자신의 영화에 그대로 적용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는 결말에서 이 신화를 뒤집어버린다. 소녀는 어머니를 응징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에게 팔루스가 없음을 원망(남근선망)하며 어머니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팔루스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뒤 한 명의 온전한 주체로 우뚝 선다.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필요 없다. 마지막에 그녀는 아버지를 죽인 삼촌에 대한 복수를 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건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했던 또 다른 아버지를 죽인다는 상징적인 의미 또한 담고 있다. 자신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고, '~을 하라'고 명령했던, 아버지의 법을 살해하고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녀가 얻은 자유는 영화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한 '신발'로도 알아볼 수 있다.
신발은 이 영화에서 '구속'을 뜻한다. 삼촌은 매년 그녀의 생일에 신발을 선물해 준다.(상자가 찰리의 색인 노란색 리본으로 묶여있다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선물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렸을 때 부터 받아온 신발을 U자 형태로 늘어놓은 채 흰 옷을 입고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인디아의 모습은 삼촌 찰리의 계획에 따라 성장한, 알에 갇혀 있는 소녀의 모습이다.
신발은 <박쥐>에서도 동일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는데 태주는 한복집에 갇혀 살 당시 맨발로 밤거리를 미친듯이 달리는 것으로 자유롭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해소한다. 그런 태주를 발견한 상현은 그녀에게 자신의 신발을 신겨주는데, 이는 물론 발에 맞지 않는 큰 신발이다. 관심과 보호인 동시에 구속이기도 한 신발. 태주는 그런 상현의 행동에 안도감을 느끼고, 자유를 찾아 상현을 따라 집을 나가게 된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상현의 신발을 신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스토커>의 인디아는 자신의 발에 꼭 맞는 붉은 뱀피 가죽 하이힐을 신고 온전히 혼자 자립하여 성을 탈출한다.
4. 박찬욱 영화에서의 여성성의 회복
나는 이 영화가 지극히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졌으며, 온통 테스토스테론으로 뒤덮였던 박찬욱 영화에서 여성성을 회복하는 작품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박찬욱은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자신이 너무 남성적인 아드레날린에 눌린 영화들을 만들어왔고 그 안에서 여성 캐릭터는 항상 진실에서 소외되어야만 했던 것에서 탈피하기 위해 여성을 중심으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스토커>가 자신의 작품 중에 딸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도.
나는 <스토커>가 박찬욱이 딸이 있기 때문에 만들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사춘기 소녀의 마음과 욕망을 제대로 들여다보려는 노력 없이는 결코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없다. 대상으로서, 희생자로서가 아닌 온전한 주체로서 소녀가 등장하는 영화가 세상에 얼마나 된단 말인가? 게다가 40대 남자 감독이 만든 영화라면 말이다. 인디아는 너무나 소녀다운 흰색 원피스를 입고 다니는, 뱀파이어 영화에서의 전형적인 희생자의 외양을 띄고 있지만 결코 단순히 그 위치에 머물지 않는다.
특히 내가 감탄했던 건 샤워씬에서의 전복이었다. 히치콕이 <싸이코>에서 샤워하는 여자가 무참히 살해되는 장면을 그려낸 후에 이 충격적인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며 수 많은 오마주와 패러디를 낳은 고전이 되었다. 인디아의 샤워씬은 히치콕이 싸이코에서 사용했던 것과 너무도 유사하게 시작되며 관객들의 불안을 자아낸다. 불투명한 커튼 뒤에 있는 여자의 알몸을 관음적으로 바라보는 카메라로 시작하여 물을 내뿜는 샤워기를 비추고 그 아래서 물줄기를 맞는 여자의 상반식을 그리는 식이다. 교차편집으로 인해 밤의 숲 속에서 삼촌 찰리와 있었던 일들이 삽입되며 이 불길함은 점점 더 고조된다. 당장이라도 찰리가 들어와 <싸이코>의 주인공이 그랬듯 무방비 상태의 인디아를 무참히 살해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장면 또한 아주 통쾌하게 전복한다. 영화의 역사에서 여자들이 몇 번이고 반복되어 살해되었던 욕실, 바로 그 장소에서 인디아는 자위를 하며 자신의 살인본능을 깨닫는다. 살해대상이 아닌 살육본능을 가진 주체로서의 탄생! 이 장면의 통쾌한 전복이란!
5. 알을 깨고 나오는 새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
<스토커>를 보고 그 비윤리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살인마의 탄생 스토리를 왜 감정 이입을 하며 지켜봐야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스토커>에서 박찬욱 감독의 미학을 확실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영화에서 땀냄새 나는 일상의 사람들을 생생하게 그려 인간적인 감동을 자아내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신화와 은유로써 영화를 만든다. 스토커의 주제 또한 그렇다현실에서 살인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지만, 영화 안에서의 살인은 은유로써 기능한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억압이다. 도덕과 윤리는 다르다. 윤리는 선악의 피안을 넘어서 존재한다. 그것은 한 주체의 적극적인 고찰과 행위에 의해 발굴되는 것이다. 기존 사회가 공동체의 규칙으로서 구성해 놓은 '하면 안된다~'는 금지의 법은 새로운 윤리를 획득하려는 주체에게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에서 말했던 저 유명한 낙타-사자-아이의 삼단계 설처럼, 진정한 윤리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일단 기존의 법에 '아니오!'라고 외쳐야만 한다. <스토커>에서 법은 정신분석학적으로 '아버지의 법'으로 치환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디아가 삼촌에게 행한 유사친부살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닌, 자립을 위한 기존의 낡은 도덕, 모든 구속에 대한 부정인 것이다. 기존의 낡은 도덕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나'의 자립에 의해 새롭게 도래할 윤리다.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에 삶은 달걀을 탁자에 대고 깨는 인디아의 행위는, 하나의 세계에서 탈피하여 새롭게 태어나려는 아기새의 최초의 몸부림을 상징한다. 박찬욱은 <스토커>에서 현실에서의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선악을 초월한 예술적 주체의 탄생, 알을 깨고 나오는 새의 비상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그 주체는 의미심장하게도 '여성'이다.
6. 왜 여성주체인가?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고 덜 도덕적인 존재이다. 왜냐하면 남근기(3~5세)때 아이는 오이디푸스, 엘렉트라 단계를 거치면서 초자아가 형성되는데 남자아이의 경우엔 거세공포로 인해 강한 초자아가 형성되어 높은 도덕성을 갖지만 여자아이의 경우엔 원래 남근이 없기 때문에 거세공포를 겪지 않아 남자아이보다 초자아가 약하고, 그래서 감정에 많이 치우치고 도덕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심각한 여성혐오이론을 현재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학자들은 없고 특히 페미니즘 정신분석가들은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이 해석을 전유하고 있지만, 나는 이걸 이렇게 해석해 보면 어떨까 한다.
'초자아'는 결국 아버지의 법이다. 사회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복종하려고 하는 의지.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 이건 <박쥐>에서 가톨릭 신부였던 상현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부분이다. 반면 박찬욱의 뱀파이어 영화에서 여성들 - 태주와 인디아-는 상대적으로 그런 초자아로부터 자유롭다. 그것은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어렸을 때 남자보다 상대적으로 한 명의 사회적 주체로서 갖춰야 할 덕목들을 덜 요구받고 자랐기 때문이 아닐까? 남성우월주의적 문화 속에서 남자아이는 어렸을 때 부터 '남성성'을 강요받으며 강하게 클 것을 요구받고, 사회적으로 주어진 책임을 다 할 것을 기대받는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상대적으로 그런 기대로부터 자유롭다. 왜냐하면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보다 약하고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고, 나중에 자라서도 사회적으로 남자만큼의 역할을 해내리라 기대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환경에서 자란 여자들-태주와 인디아-이 기존 사회의 통념에서 오히려 더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기 쉬웠던 건 아닐까? 물론 이건 신화적이고 이론적인 측면에서의 해석이지만 말이다..
때문에 <박쥐>에서 죄의식적 남성주체인 상현이 하지 못했던 것-뱀파이어로서의 정체성을 과감히 인정하는 것-을 여성인 태주는 해낼 수 있었고, <스토커>의 인디아는 자신을 새로운 정체성으로 이끈 유사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온전히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