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으로 영화읽기1
쟁쟁한 여성 배우들이 극의 중심에서 욕망의 주체로 활약하는 영화를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페미니즘 붐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이후 여성 중심 영화들이 눈에 띄게 많이 개봉하고 있고, 최근엔 퀴어요소까지 가미된 영화들이 많아 흥미를 더 한다.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는 이런 요소들을 두루 갖춘, 시대의 요청에 응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레이첼 와이즈, 엠마 스톤, 올리비아 콜맨 이라는 걸출한 세 배우가 18세기 영국 궁정을 배경으로 만나 궁중 암투극과 치정극을 벌인다. 그에 더해 남성을 주요 무대에서 완전히 제거해 버림으로써, <더 페이버릿>은 여성 욕망을 다룬 영화 중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영화에서 언제나 우화적이고 원형적인 세계를 그려내는 감독이다. 그리고 그 세계의 중심엔 가족이 있다. <송곳니>에선 세상과 단절된 가족 이야기를 통해 독재 사회를, <더 랍스터>에선 파트너가 없으면 동물로 변해버린다는 설정을 통해 이성애 가족 제도를 풍자했고 <킬링 디어> 에서는 고대 그리스 비극을 모티브로 한 가족 잔혹극을 통해 원형적 세계를 그려냈다. <더 페이버릿>은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쓰지 않은 첫 번째 작품인데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궁중 암투극이지만, 나는 이 영화 또한 란티모스 감독의 성향이 반영된 원형적 이야기로 보았다.
그가 이번에 <더 페이버릿>에서 앤 여왕 시대를 통해 그리고자 한 원형적 세계는 기존의 정신분석적 욕망 구도에서 '남성'을 제거해 버린 실험실 처럼 보인다. 이 서사의 중심엔 단순히 남성이 부재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남성이 있을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여성이고 그 여성이 레즈비언일 경우 권력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남성이 대체 왜 필요하겠는가? 이런 상황설정은 정신분석학에서 모든 사람의 욕망을 근거짓는 기표로 남성의 생식기관인 '페니스/팔루스'를 놓는다는 것을 희화화하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페니스 없는 사람이 최고 권력을 갖고 있고 아무도 페니스 달린 사람을 원하지 않는 세상에서 특권적인 기표가 '팔루스'라는 것은 얼마나 가당찮은 일인가.
정신분석학에서 팔루스는 욕망의 대상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선 페니스를 가진 남성만이 사회의 주요 권력을 획득할 수 있고, 그것을 결여한 여성은 2등 시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니스를 가진 남성들은 거세공포(권력 상실의 공포)를 갖고, 여성들은 애초에 그것을 결여했기 때문에(=직접 권력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에) 남성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어 간접적으로 권력을 쟁취하려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권력자는 페니스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결여가 아니다. 왜냐면 그녀는 17세기 영국의 최고권력자인 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페니스를 원하지도 않는다. 레즈비언이니까. 이게 바로 이 영화를 가장 재밌게 만드는 요소인 것 같다.
사라 멀버리 공작 부인(레이첼 와이즈)은 장군의 기질을 타고난 야심가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앤(올리비아 콜맨)의 마음을 사로잡아 최측근으로 지내며 마음 약하고 우유부단한 앤 대신 국정을 대신 보다시피 하고 있다. 그들은 우정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관계로도 강하게 맺어져 있다. 뚱뚱하고 통풍에 시달리는 앤은 아름답고 건강한 사라를 욕망한다. 사라는 앤의 통증과 성욕을 돌봐주며 그녀의 마음을 자신에게 붙들어 놓는다. 그러나 사라가 돌봐주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앤이 키우는 토끼들이다. 이 영화는 앤과 사라 그리고 토끼들로 시작하는데, 첫 장면에서 사라는 토끼들을 쓰다듬어 주라는 앤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앤은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토끼의 의미는 이후 이들 사이에 '애비게일'이 등장하게 되면서 드러나게 된다.
(이후 스포주의)
사라의 친척이자 궁중 하녀로 입궁하는 애비게일(엠마 스톤)은 몰락한 귀족의 딸로,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 앤을 두고 사라과 권력 암투를 벌이게 된다. 국정을 돌보느라 바쁜 사라가 앤을 소홀히 하는 사이, 애비게일은 사라와 다른 방식으로 앤에게 접근한다. 그건 앤의 결핍을 보듬어 주는 방식이다. 자신의 방식으로 앤을 사랑하고 그 방식에 만족할 것을 요구하는 사라와 달리, 애비게일은 앤이 가장 원하는 것을 재빨리 파악하고 자신이 그것을 줄 수 있음을 어필한다. 애비게일은 앤이 언급하기도 전에 토끼에게 관심을 보이며 그들을 귀여워 하는데, 17마리의 토끼들은 사실 앤이 유산하거나 어린 시절 죽어버린 자식들 대신 앤이 입양한 것이었다. 죽어버린 17명의 아이들. 즉 토끼는 앤이 상실한 것이자, 채워질 수 없는 결여를 상징한다. 애비게일은 바로 앤의 고통에 공감하며 토끼들을 귀여워하고, 앤은 애비게일이, 사라가 자신에게 주지 못 했던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서서히 품게 된다.
어떤 리뷰어는 이 권력암투극이 단지 왕의 성별만 여자로 바뀐 것 뿐이지 그닥 새로울 것 없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다르게 봤다. 앤이 여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가능한 관계의 디테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앤은 왕으로서 최고의 권력을 가졌지만 영화 안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최약체인 사람이다. 그녀는 자식들을 모두 잃은 고통으로 공허해 하며 폭식하고 토하고 시도때도 없이 우울해 하는데다 변덕이 죽 끓듯 하다.(종 잡을 수 없고 한 없이 나약하면서도 나름 강단있는 복잡한 캐릭터를 풍부하게 연기한 올리비언 콜먼에게 찬사를 보낸다!) 남자였다면 받지 않았을, 자식을 유산하고 잃은 고통으로 앤은 괴로워 하며, 그녀의 통풍은 히스테리 발작 증상처럼도 보인다. 또한 앤이 남자였다면 사라는 앤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으로 권력을 갖지 못 했을 것이다. 사라는 앤과의 관계에서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로서 힘을 행사한다. 국정에서는 대부분의 일을 직접 나서서 해결하며 상황이 맘에 들지 않게 풀리면 신체적 우월함으로 앤을 제압하고 위헙하기도 한다. 동시에 사라와 애비게일은 남자였다면 해 주지 못 했을 방식으로 앤을 돌보고 보살펴준다.
이외에도 영화는 이 시대가 남성이 더 화장을 많이 했던 시기라는 것에 착안하여 우스운 가발을 쓰고 화장을 덕지 덕지한 남성들을 유머러스하게 그리며, 거위 달리기나 광대에게 과일 던지기 같은 유치하고 천박한 놀이에 흥분하는 그들을 희화화 하여 묘사하기도 한다. 때문에 애비게일의 화장이 남자처럼 짙어지고 그녀가 남자들과 함께 물건을 던지는 놀이에 탐닉하고 있는 모습은 부패나 타락처럼 다가온다. 이 영화에서 만큼은 '남성적'이란 것이 인공적이고 어리석으며 부패한 것의 상징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들을 싸우게 만들고, 유혹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사실 '남자'가 아니라 '권력'이라는 것. 권력의 자리에 있지 않으면 남자는 쓸모 없고 페니스란 것도 그닥 욕망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팔루스'란 기표가 얼마나 남성중심적, 이성애중심적 개념인지를 드러내 준다. 동시에 이 영화는 정신분석학의 욕망이론이 남성중심,이성애중심에서 벗어난다면 얼마나 범용적으로 응용될 수 있는 지를 증명해주기도 한다. '거세공포' 란 개념 또한 다른 이미지로 치환되어 나타나는데, 그건 '추락'의 이미지다. 궁으로 오는 마차에서 애비게일은 똥이 가득한 진흙탕에 떨어지며, 궁에 와서도 토리당 당수 할리에게 밀쳐져서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 뒤 사격 연습을 하다 사라에 의해 쓰러지기도 한다. 첫 번째 추락은 귀족 계급에서 하인으로 떨어진 애비게일의 처지를 상징하며, 두,세번째 추락은 애비게일에게 이 궁중 암투에서 실패하면 언제든 더 낮은 계급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공포를 불러오는 추락이다. 앤 또한 어린 시절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때 사라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고 한다. 이는 사라에게 앤이 의존하게 된 심리를 드러내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앤은 왕으로서 권위를 유지하는 것을 벅차하고 있으며, 사라에 의존함으로서 거기서 추락하지 않으려 한다. 흠 없어 보이던 사라 또한 중반부에 낙마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녀가 권력을 잃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추락이 남자에게 당하는 모욕과 연결되어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포인트다. 애비게일은 몰락해서 나이 많은 남자에게 팔려갔던 과거가 있고, 사라는 낙마 후 매춘굴에서 눈을 뜬다. 앤 또한 낙마를 했을 때 남자에게 모욕을 당한 이야기를 한다. 이는 이들이 현재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이 여왕이 지배하고 있는 궁 안이라는 특수한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그 세계에서 추락하면 언제든지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자'의 위치로 돌아가 남자에게 모욕을 당하리란 암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셋 사이의 권력과 애정 싸움으로 긴장감 넘치던 초중반과 달리 시종일관 강한 카리스마로 극을 장악하던 사라가 하루 아침에 축출되고 난 뒤는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을 보고선 납득했다. 욕망이란 결코 충족될 수 없으며 덧 없고 허무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가 사라와 앤의 사랑이야기라고 하며 결국 앤을 사랑한 사람은 사라였다고 하지만 난 그게 너무 나이브한 해석이라고 본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없다. 애비게일과 마찬가지로 사라도 앤을 조건적으로 사랑한 거다. 앤이 왕이 아니었다면 사라는 앤을 사랑하지 않았을 거다. 단지 달랐던 점은 사랑을 통해 얻고 싶었던 목표이다. 애비게일은 자신의 신분 회복이었던 반면, 사라는 정권 장악이었다. 전자는 일회적이고 한 번 성취하면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목표이지만, 후자는 영속할 수 있는 욕망이다. 권력 다툼 중에 사라가 애비게일에게 넌 날 따라올 수 없다는 뉘앙스로 말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건 단순한 허세가 아닌 사라가 애비게일의 그릇을 알아봤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네가 원하는 건 고작 신분 상승이지만 나는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라는 것. 따라서 사랑이라고 하기 보다는 사라가 앤을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리라.
최후에 앤이 애비게일의 본심을 깨닫고 후회하는 듯 보이는 것은, 사라의 사랑을 깨달았다기 보다는 애비게일로 인해 결핍이 채워질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 자신의 환상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환상에서 깨어난 자의 환멸에 가득찬 채로, 앤은 애비게일에게 애무를 명령한다. 그게 자신을 만족시켜줄 수 없으리란 걸 알면서도, 그녀는 애비게일을 짓누른다. 애비게일이 자신의 토끼를 짓눌렀듯이. 애무 받는 앤과 애무 하는 애비게일, 그리고 무수한 토끼 떼들이 각 쇼트로 나뉘어져 서로 오버랩 되는 장면은 욕망의 속성에 대한 란티모스의 결론이다. 욕망하는 것이 페니스건 버자이너이건, 결핍은 결코 채워질 수 없고 상실감은 영원하리라.
* 앤 여왕 시대 정세도 그렇고 여왕 캐릭터도 그렇고 너무 흥미로운데 왜 지금까지 영화화 안 되었던 거지... 이 영화 성공을 보고 여기 저기서 작업 착수해서 드라마도 만들고 아무튼 컨텐츠 계속 만들었음 좋겠다. 천일의 앤보다 훨씬 재밌는데 왜 이제야 만들었냐구,.
* 앤 여왕 캐릭터 진짜 짱 좋다. 진짜 변덕스럽고 히스테릭하고 심약하고 어린애 같고 근데 아픈 과거 있고. 뭣보다 자기 욕망에 솔직한 게 좋았다. 이런 다면적인 여성 캐릭터 앞으로도 계속 많이 만들어 달라구..왜 이제야 만들었냐구..
* 올리비아 콜맨이랑 레이첼 와이즈 연기 너무 좋았는데 그에 비해 엠마 스톤 연기가 많이 부족하다 느꼈다. 충분히 더 미묘한 뉘앙스를 살려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인 것 같은데 너무 1차원적으로 연기한 것 같다.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매력이 있긴 하나 그게 과연 시대극에 어울리는 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 마다 항상 비슷한 캐릭터로 나와서 비슷한 표정 지으니까 더 지겹기도 하고..
*앤과 사라의 관계는 BDSM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사라가 도미넌트고 앤이 서브미시브... 같이 승마 나갈 때 사라가 앤 한테 보조대 입히는 게 의식 처럼 묘사되는데 그거 좀 구속복 같았구요..피지컬한 측면까진 몰라도 그냥 얘네 생활 패턴이 너무 지배와 복종을 기반으로 해서 이뤄지는 보살핌과 헌신의 관계 같았음.
앤은 사라의 지배적이고 짖궂은 면에 불만을 느끼고 자신의 결핍을 좀 더 세심하게 보듬어줄 사람을 원하지만..실은 m이었고 사라에게 복종당하는 상황에서 더 안정감 느끼고 행복해 질 수 있는 유형이었던듯. 사실 애비게일 치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사라가 나랏일에 너무 바빠서 잠시 소홀했던 틈 타서 그런 거 아니냐.. . 그렇게 m은 자신이 원하던 것이 자유가 아니었단 걸 깨달았습니다..란 결말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