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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여사가 왜 그럴까?

하마라고 부른다

by 달라스 Jasmine

시트콤이 거의 매일 일상이 된 K 여사의 집을 들여다본다.

무해하지만 결코 무해하지 않은 때론 용맹하고 때론 해맑은 그녀와 그녀 가족의 이야기 지금 시작한다!




미국에서 큰딸과 손자가 오늘 저녁 도착한다. K 여사의 마음은 바쁘기 그지없다. 큰딸이 좋아하는 파무침도 무쳐야 한고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불편하지 않게 목욕탕과 큰딸이 쓰던 방도 청소해야 하는데 남편은 천하태평이다.

늙은 영감탱이, 나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손하나 까딱 안 하고 삼성 야구에 빠져서 소리를 쳐 지르는 모양새라니
에이씨! 또 삼진이네. 뭐 하는 짓들이야. 에이쒸!
여보! 야구 좀 그만보고 이 파 좀 다듬어 줘요. 영아가 좋아하는 파무침 하게요. 파 다듬고 더덕 껍질 좀 벗기고요.

시선은 여전히 야구에 두고 영감탱이는 마지못해 파 그릇을 받는다.

화단에 물은 줬어요?
안 줬어. 안 줘도 돼! 무슨 물을 그렇게 자주 줘
왜 그래요. 당신. 이 여름에 물을 매일 줘야 상추랑 고추랑 무화과랑 다 견디지요!
안 주면 다 말라비틀어진다고요.
야구 볼 시간에 화단에 물도 좀 주고 하라고요.
나 혼자 바빠 죽겠네. 오늘 애들 오는데…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영감 옆에서 이래저래 소리를 질러도 듣는지 마는지 속에 천불이 나려고 한다. 그나저나 영아는 잘 오고 있겠지. 파무침 잘 먹겠지. 우리 동원이는 이제 편식 좀 안 하려나. 이번엔 뭘 좀 해서 먹이지.

여보! 더덕은 다 깠어요? 애들 올 때 다 됐는데.

들었는지 말았는지 대답이 없어서 여보! 하고 부르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우리 영아 고등학교 동창 수희다.

아이고. 수희야. 네가 공항에 나간다고? 고맙다. 수희야!
늘 니가 수고가 많네.

영아는 친구복도 많지. 친구 부모한테 때마다 과일 보내고 가끔 들어다보고 이런 친구가 어딨 을까. 벌써 수십 년 친구의 정을 이어가고 있는 둘이 참 대견하고 흐뭇하기만 하다. 안 그래도 영감이 예전 같지 않아 밤 운전이 좀 불안했는데 수희가 대신 공항에 나간다니 K여사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딸과 수희의 우정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대구공항에 도착한 영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과 함께 왔으면 또 5시간 버스를 타고 거제도로 향했겠지만 이번엔 아들과 홀홀 둘이라 친정 대구에 먼저 들리는 거였다.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아 아빠한테 전화를 했더니, 아빠의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잘 도착했나? 내가 지금 나가려고 하는데.
어? 아빠, 말씀 못 들으셨어요? 수희가 공항에 나오기로 헀어요. 아빠 안 나오셔도 돼요!

아빠와 통화를 못했으면 아빠가 헛걸음을 하실뻔했다. 엄마가 얘기를 미처 안 해준 모양이다.

아빠와 전화를 끊고 사람들 행렬을 따라 걸어가는데 문이 열리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반가운 수희의 모습이 보였다.

피곤하재? 내가 웰컴 플래카드 만들어올라다가 말았다.
동원이, 안녕!

언제나 기분 좋은 미소를 하고 있는 수희의 모습을 보니 긴 여정의 피곤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어느새 준비했는지 요즘 유행하는 각종 김밥에 유부초밥까지 한가득 음식 상자를 내민다.

제대로 뭐 먹지도 못했지? 배고프겠다. 부모님 하고 나눠 먹어.

나 대신 부모님을 자주 들여다보고 언니네 참외농장에 참외도 해마다 보내고 곰살맞고 살가운 수희가 그저 너무 든든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어느새 엄마, 아빠가 계신 집에 도착했고, 우리를 맞으러 뛰어나오신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작년보다 마르신 아빠, 동생이 하는 독일 건강 보조식품을 드시고 처녀 적보다 더 날씬해지셨다는 엄마는 몸매도 몸매지만 더욱더 건강해 보이셨다. 수희에게 연신 고맙다 인사를 하고 우린 안으로 들어갔다.

동원이 얼굴이 좋아졌네. 요즘은 편식 안 하나?
안 하는데요. 잘 먹어요.

요즘 살이 좀 오른 동원이를 보고 아빠는 흐뭇해하셨다.

나를 본 엄마가 던진 말,

아이코, 하마가 들어오는 줄 알았네.

작년에 집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장면이 데자뷔처럼 스쳐 지나갔다. 엄마가 던진 첫마디는 니 눈에 주름이 자글 자글 나보다 주름이 더 많네. 열네 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딸에게 1년 만에 본 날 던진 한마디가 자신보다 주름이 많다는 말에 난 버럭 화를 냈었다. 1년 만에 본 딸에게 그게 할 말이냐고.


나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고 그 누구에게나 친절하기로 유명하다. 단 유일하게 그 친절이 엄마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엄마에게는 화를 내고 막말을 하기도 한다. 엄마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엄마도 예전 같지 않고 어린애 같은 구석이 생기는 걸 몇 년 전부터 느끼면서 예전처럼 화를 내지는 않지만 피곤에 지친 딸에게 내던진 첫마디가 주름이 자글자글은 아닌 듯싶었다. 버럭 화를 내자 엄마는 미안 미안 하며 그 특유의 개구쟁이 눈웃음을 지었지만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나도 이제 적응이 됐는지 엄마의 필터 없는 말이 이번엔 고깝게 들리지 않았다. 화가 안나는 것이라기보다 그냥 포기했다고 할까.

내가 요 몇 달 사이 살이 좀 찌긴 했지만 하마라니….


악의가 없다는 걸 알기에 난 그냥 못 들은 체했다. 앞으로 또 며칠 엄마의 필터 없는 말과 본인은 결코 무해하지만 결코 남에게는 무해하지 않은 그 행동들을 잘 견뎌낼 수 있을지. 우리 둘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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