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李씨(이하 이): '1982년생 김지영',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 책을 덮으며 얼마나 많은 김지영들이 있었던 걸까 생각했지. 마치 여성차별에 대한 종합다큐멘터리인 것 같은 줄거리에 어느 한 부분이라도 같은 처지임을 공감하지 않을 여성이 많지 않겠다... 고.
그러면에서, 나는 그 많은 가능성을 다 비껴간, 겁나게 운이 좋은 사람이더라고. 조부모님과 부모님 어느 한 분도 딸이라고 차별하지 않으셨고(띠동갑오빠에게 나보다 많은 책을 사준 것은 패스), 중등고등대학교를 전부 여자학교로 다녔으며, 졸업 후 첫 직장도 여초집단, 그 후 시작한 교직도 여초집단, 상식적인 시월드와 가부장적이지 않은 남편. 어쩌면 다른 상황을 만났더라면, 오늘의 나는 다른 모습이었을 수도.
점선면(이하 점): 오늘의 책과 '1982년생 김지영'이 무슨 관계가 있길래?
이: 대한민국의 김지영은 가족과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순응하기 위해 자신을 맞춰가면 살아내느라 결국은 자신을 잃어간다는 어두운 느낌이라면, 오늘 소설의 주인공 엘리자벳 조트 Elizabeth Zott는 사회적인 규범과 요구를 거부하고, 도전한 여성이라서.
그녀를 정리해 보자면, 1950-60년대 미국사회를 흔들며 떠오른 똑똑하고 아름다우며 기 센 여성.
그녀가 받는 차별과 무시, 오해, 부정의 시선에도 끝까지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걷는다는 게 그녀의 특이점이지. 그녀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잘못이 누구에게 혹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그 부분을 지적하는데 거침이 없어.
점: 어떻게 미국사회를 흔들었다는 거야?
이: 엘리자베스 조트는 다니던 화학 연구소에서 해고당하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역방송사의 요리프로그램 -서퍼 앳 식스 Supper at Six- 호스트를 시작해. 방송사에서 원하는 다정하고 애교 있고 사랑스러운 여성의 이미지는 싹둑 베어내고 그녀만의 색을 입혀나가지. 그녀는 웃지 않고 진지한 얼굴과 태도로 화학자답게 어려운 화학용어를 써가면서 재료를 설명하고, 요리과정을 설명하고, 음식을 만들어 가족을 먹인다는 어느 누구도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주부들의 노고를 치하해 주고, 쇼의 말미에는 아이들에게 '상을 차려라, 이제 엄마도 엄마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일침을 날리지.
그뿐인가, 살을 빼고 싶다는 여성에게는 자신이 즐기는 '조정 rowing'을 소개해주면서 운동을 권하고, 인종이나 성별에 따른 차별에 반대한다면서 자신은 로사 파크스Rosa Parks와 같은 편이라고 모든 차별의 벽은 깨어져야 한다고 당당히 말해. 방청객 중에서 한때 심장외과의가 꿈이었다는 아이 다섯을 둔 주부에게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꿈이 있다면 지금 그것을 이루기 위해 시작하라고 하지.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밝히고 이에 뒤따라온 비난에도 자신이 화학자이자 과학자이며 왜, 신을 믿지 않는지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아.
그녀의 방송은 지역방송을 뛰어넘어서 전국 방송이 되었고, 방송과 함께 그녀도 유명해지게 되지. 그녀의 당당함이 느껴지는 부분들이 뭐냐면, 힘주어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내용을 있을 때 그녀는 카메라를 정면에 두고 응시한 채로 말한다는 것.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거짓을 떠드는 사람들에게도 그녀는 그런 당당한 시선으로, 찌른다고 해야 할까?
점: 전국 각지에서 그 프로그램을 보는 주부들이 열렬한 반응을 보였겠어. 하지만, 유명세가 커지다 보면 안 좋은 일도 생기기도 하잖아. 그리고, 엘리자베스 조트가 말하는 내용에 불편함을 느끼는 집단이나 상대들이 분명 있었을 것 같아.
이: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유명세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싼 일에 결정이 단호했어. 그리고 늘 자신은 '화학자'라고 생각했고. 방송 호스트로서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접근하는 모든 요청에는 거절했지. 그러다, 어느 날 Life 지 기자가 한 명 그녀와의 인터뷰에 성공했는데, 그게 그만 그녀에게 결정타가 되고 말아. 그녀가 털어놓은 그녀의 개인사는 관계된 인사들에게는 치명적인 공격무기였거든. 대학원 때 성폭행을 시도한 지도교수, 임신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해고하고, 자신의 연구논문을 도둑질한 화학연구소 소장.
하지만 그녀의 인터뷰는 그녀가 말한 내용대로 출판된 게 아니라, 잡지사의 편집자가 원하고 그녀의 적수들이 말한 대로 편집되어서 출판되고 말지. 심지어, 그녀의 불운한 연애, 사랑, 가정까지 폭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세트장에 걸어 나가고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거짓 출판물에 대한 일침을 날리는 것을 잊지 않지.
점: 들을수록 매력적인 여성이고, 그녀 주변에서 있었을 그녀를 화나게 하는 일들이 궁금해지는데, 이 씨가 불운한 연애와 사랑이라고 했잖아. 이런 여성이 사랑에 빠진다면 그 대상도 보통은 아니었을 거 같아.
이: 이 똑똑하고 당차고 아름다운 여성, 그녀를 매혹시킨 사람이 있지. 그 사람 역시 엘리자베스에게 반했고. 그들의 공통점은 화학자. 같은 화학연구소에서 만났고, 외모보다는 서로의 지성에 더 이끌렸어. 캘빈 에반스Calvin Evans는 그녀가 만나기 전 이미 이름을 날리는 화학자였지만, 캘빈은 엘리자베스가 가진 화학자로서 이 영민함과 가능성을 알아봤지.
열렬한 사랑과 연애를 했지만, 캘빈 에반스의 진지하고 간절한 청혼에 엘라자베스는 시큰둥해.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단호하게 거절하지. 자신은 가정을 이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그 시대에 엘리자베스는 결혼이라는 법적 울타리를 거부하고 동거하는 걸로 만족해. 당연히 아이를 키울 생각도 없고.
캘빈은 부모에게 받은 깊은 상처로 괴로워하는 인물인데, 가정을 가지고 싶어 하고 엘리자베스는 부모에게 느낀 환멸 때문에 가정을 거부해.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깊이 만족하고 행복감을 느끼며 다른 동료들의 질투를 받을 정도로 일에서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는데...... 그만. 여기까지.
이 소설이 애플 TV에서 8부작 드라마로 제작이 되었더라고.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조트 연기자가, 우주의 평화를 지키는 여전사 캡틴 마블을 연기한 배우. 뭔가 이미지가 연결되지?
작가는 98번의 거절 끝에 이 소설을 65세에 처음 출판한 여성 신인.
작가 소개를 읽고 나서 소설을 읽었는데, 엘리자베스 조트와 작가가 자꾸 오버랩이 되었어.
둘 다 조정을 한다는 점, 반려견을 키우면서 깊이 교감한다는 점, 당당하게 자신이 사랑하는 분야에서 일을 한다는 점. 엘리자베스 조트가 마지막으로 TV쇼를 진행하면서 한 말
'요리는 화학이고. 화학은 삶이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바꾸는 능력은 여기에서 시작된다.'을 자신의 사람에서 실현시켰으니.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이 소설은 (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에 견주어)
-여성의,
시대의 부당함에도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부당함을 응시하는 여주인공의
-여성에 의한,
자신의 나이와 이력을 뛰어넘어 도전과 성공을 이뤄낸 작가에 의한
-여성을 위한,
서퍼 앳 식스를 보면서 주부로서 삶에 대한 다른 시선을 갖게 된 시청자들처럼,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삶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갖게 될 독자들을 위한
이렇게 정리되더라.
닥친 상황은 고구마 백개먹은 것 같은 데,
이 기 쎈 언니의 사이다 같은 마이웨이 돌파력,
그에 못지않은 리틀 엘리자베스의 마이웨이 집요함과 대담함 덕분에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해피엔딩임을 밝혀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