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조교 Dec 17. 2024

브로드웨이 뮤지컬 <하데스타운> 주연 이해찬 인터뷰

동양인 최초, 하데스타운 주연을 맡은 한국계 미국인 배우 이해찬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 어두운 밤을 밝히는 2024년 대한민국의 겨울. 지구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촛불 하나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동양인 최초 브로드웨이 뮤지컬 <하데스타운>**의 주연 ‘오르페우스’를 맡은 ‘이해찬(Timothy H. Lee)’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12월 3일, 브로드웨이 <하데스타운>이 올라간 ‘월터 커 시어터(Walter Kerr Theater)’에서 오르페우스 역할로 첫 공연을 마무리했다.


** 뮤지컬 <하데스타운> : 그리스로마신화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만들어진 브로드웨이 인기 뮤지컬로 2019년 초연되어 지금까지 공연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2021년 초연되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하데스타운> 오르페우스 역할을 맡은 이해찬 배우(사진 제공 : 이해찬)


그는 인터뷰 내내 ‘감사하게도’, ‘감사하죠’라는 말을 연신 덧붙였다. 어린 시절 한국에서 건너온 이민자로서, 아시아인으로서 무대에 올라갈 수 있는 자체만으로 눈물 나게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이해찬 배우. 그의 말속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은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묵묵히 길을 걸어가고 있는 여행자의 뜨거운 심장박동 그 자체였다.

인터뷰가 진행된 곳은 맨해튼의 빌딩숲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곳. 이곳은 실제 이해찬 배우가 <하데스타운> 오디션을 봤던 곳이다. 수 백번의 오디션에서 고배를 마시고 매일 밤 홀로 울면서 외로이 노래 연습을 하던 청년. 넘어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하며 꿋꿋이 한 걸음씩 나아가던 이방인. 그는 마침내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온기를 전하는 환하고 따뜻한 촛불, 오르페우스가 되었다.


<하데스타운> 리허설이 한창 진행 중인 12월의 어느 아침. 잠깐의 휴식조차 허락되지 않는 빽빽한 일정 속에서 한국 창작 뮤지컬 <배니싱>의 오프 브로드웨이 진출을 목표로 진행되는 워크숍에 합류해 연습을 하고 있는 이해찬 배우와 화상 인터뷰를 나누었다. 

브로드웨이 <하데스타운> '워커'로 매 공연에 올라가는 이해찬 배우

황조교 :  요즘 너무 바쁘시죠?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이해찬 :  요즘은 연기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많이 가르치거든요. 오전 10시부터 2시까지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하데스타운>의 오르페우스 리허설을 2시에서 5시까지 진행합니다. 그리고 5시부터 7시까지 헬스장 가서 운동을 하고 7시부터 공연이 시작하기 때문에 곧장 공연장으로 갑니다. 브로드웨이 <하데스타운>의 워커로 주 8회 공연을 소화하고 있고 약 3개월이 지났으니 지금까지 100회 정도 무대에 오른 것 같아요.


황조교 : 그럼 언제 쉬세요?


이해찬 : (아무래도 오르페우스로 무대에 올라야 하기 때문에) 쉼이 잘 없는 것 같아요.


황조교 : 우선 너무 축하드립니다. <하데스타운> 브로드웨이 공연의 상세한 리허설 과정이 궁금합니다.


이해찬 :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팀(창작진)이 대부분 다 붙어서 집중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도 투어에서 오르페우스로 무대에 올랐기 때문에(이해찬 배우는 <하데스타운> 투어 공연에서 오르페우스로 무대에 올라갔다) 사실 수월하게 올라갈 줄 알았는데 브로드웨이는 배역에 대한 기준이 정말 높기 때문에 더 강하게 훈련을 시킵니다.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창작진들이 저를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합니다. 이 스태프들이 한국 <하데스타운> 초연 때도 참여를 했던 스태프들이었어요. (당시는 코로나 때문에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본인들도 한국에 갔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정말 반가워해 주더라고요.


황조교 : 오르페우스로 올라간다는 소식을 처음 들으신 게 언제예요?


이해찬 : 제가 뮤지컬 <개츠비>**라는 작품을 여름에 하고 있었어요.


** 뮤지컬 <개츠비> :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오디컴퍼니의 <위대한 개츠비>와는 다른 작품. 하데스타운의 연출 레이철 채프킨과 퓰리처상을 받은 극작가 마티나 마요크가 각색을 맡은 작품이다.  
그는 <하데스타운> 미국 투어 공연에서도 '워커'와 주연 '오르페우스'를 동시에 연기했다.

이해찬 : 그때 브로드웨이 <하데스타운> 오디션 제의를 받았어요. 사실 브로드웨이 <하데스타운>에서 앙상블을 뽑을 때는 (대개) 미국 투어 공연에 참여하던 배우들을 데려와서 쓰는 게 일반적 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공개 오디션을 연 게 2년 반 만인 거예요. 처음에는 오디션도 안 잡히길래 “날 진짜 싫어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파이널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아서 아침 일찍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디션을 보고 돌아왔어요. 몇 천 명이 오디션을 봤다고 들었는데 약 일주일 후에 합격 소식을 들었습니다. 브로드웨이 <하데스타운>의 ‘워커**’로 합격을 했고 ‘오르페우스’로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은 (인터뷰일 기준) 3-4일 전에 알게 됐습니다.


** 워커(worker) : 뮤지컬 <하데스타운> 속 지하 세계(하데스타운)의 일꾼을 담당하는 배우들로 극 중 다양한 역할을 겸하고 있다.



사실 제가 (한 작품의 주인공으로) 공연을 한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제가 (오르페우스로) 무대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해요. 브로드웨이 <하데스타운>에 한 공연마다 매번 3-4명의 한국인 관객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한국 관객 분들께서) ‘힘이 난다.’ , ‘용기를 얻고 간다.’ 이런 말씀들을 해주시니까 오르페우스라는 역할을 했을 때 아시아인 배우가 얼마나 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지 기대가 되는 거죠.


그는 뮤지컬 <맘마미아!>로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황조교 : 이야기를 들으니 해찬 배우와 과거에 나눈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당시 “혼자 싸우는 게 너무 외롭다.”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불과 1-2년 사이에 OD컴퍼니의 <위대한 개츠비>, <어쩌면 해피엔딩>**처럼 한국인들이 주축이 되어 제작하고 있는 뮤지컬들이 하나 둘 올라가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브로드웨이에서도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예전에 말씀하셨던 ‘외로움’이 조금 사그라들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 박천휴 & 윌 애런슨 콤비의 한국 창작뮤지컬로 2024년 11월부터 미국 브로드웨이 벨라스코 시어터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현지에서도 호평을 얻고 있다.


이해찬 : 너무너무 감사하게도 아시안 배우들이 점점 많아지는 걸 체감해요.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창작진이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시안 배우들이 많아져도 배우를 쓸 창작진이 없으면 고용을 못 하니까요.  1년 전이랑 비교해 봤을 때 정말 많이 변했지만 아직 아시안 배우가 브로드웨이 공연의 주인공을 맡는 게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가령 ‘아시안 배우가 무대에서 멋있을 수 있나?’, ’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죠. 


아직도 아시아인 배우들은 주로 웃긴 역할이나 귀여운 역할을 맡아요. 단적인 예로, 뮤지컬 <위키드>의 '보크'는 아시안 배우가 연기를 한 적이 굉장히 많아요. 하지만 남자 주인공 '피예로'는 아시아인이 맡은 적이 아직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요즘은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 자체로도 많은 변화를 체감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오디션도 못 봤거든요. “Slowly but surely” 말 그대로 느리지만 천천히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 이민 초창기 이해찬 배우(좌) / 학교 재학 시절 이해찬 배우(우)

황조교 :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고 힘든 학창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학교 폭력과 따돌림 속에서 ‘극단’이라는 공간에서 안전함을 느끼셨다고 하셨는데요. 이후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본격적으로 사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궁금해집니다.


이해찬 : 아직도 잊을 수가 없는 게 집에서 가족들이랑 같이 25주년 <레미제라블> 기념 공연을 영상으로 봤어요. ‘저거다. 저거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무지막지하게 들어서 3년 동안 부모님이랑 싸웠던 것 같아요.


황조교 : 어떻게 설득을 하셨어요?


이해찬 : 설득은 따로 안 하고 그냥 학교에 들어갔어요. 아버지께서 이 이야기하시는 걸 싫어하시는데 당시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유행했던 적이 있어요. 저를 조용히 정말 부르시더니 “김범수는 입이 큰데 넌 입이 작아서 안 된다.”라고 그런 말을 하셨거든요. 물론 지금은 두 분 다 (배우 활동하는 것을) 너무 좋아해 주십니다. 


** <나는 가수다> :  MBC에서 진행한 음악 경연 프로그램으로 쟁쟁한 가수들이 나와 순위 경쟁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


사진 : 이해찬 배우 제공


황조교 : 그렇다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해찬 배우를 버티게 한 단 하나의 가치 또는 원동력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이해찬 :  조금은 변태 같지만, 독기인 것 같아요. 가진 게 없으니 바라볼 사람도 없었고 기대치도 존재하지 않았어요. 하루하루를 ‘이게 맞나?’ 의심하며 살았거든요.


‘이런 소리를 내도 되나?’, ‘브로드웨이에서 원하는 배우는 어떤 모습일까?’ 이런 의문들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반대로 ‘티모시(이해찬 배우의 영어 이름)’라는 배우의 자아를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이게 내 목소리고, 이게 내 연기고, 이게 나라는 사람이 무대에서 방출할 수 있는 에너지야. 어때?'라는 단계까지 온 것 같아요. 매일 밤 혼자 울면서 연습을 하던 고독의 시간이 저를 더 단단하게 해 준 것 같아요.


사진 : 이해찬 배우 제공


황조교 : 의심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역설적으로 느껴집니다. ‘독기’ 자체가 잘못 발현이 되면 나쁜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갈 수도 있잖아요.


이해찬 : 맞습니다. 꼭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게 뮤지컬이라는 산업 자체가 경쟁을 부추기는 산업군인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독기가 나의 열정이자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독기의 끝에는 (다행히도) 나 자신을 사랑해 줄 줄 아는 마음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겸손 해질 수 있고, 감사함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지금도 그래요. 공연을 주 8회씩 하다 보면 (특히 앙상블들은) 정말 힘들잖아요. 배우들이 공연하기 전에 “We have to do it(우리 이거 해야만 해)”라고 얘기하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동료 배우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We have to가 아니라 We get to라고.” 우리는 이 공연을 하게 된 거라고요. 이제는 조금 더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독기를 경험해 보니 경쟁으로만 이 자리에 올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자신의 예술성을 사랑하고 자신의 독창성을 사랑한다면 언젠가는 그걸 바라봐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황조교 : 그렇게 커리어를 차근차근 밟아오던 과정에 팬데믹이 터졌습니다. 그전에 성대결절로 인해 정말 많은 고생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몸과 상황이 둘 다 따라주지 않을 때 느낀 불안감이 엄청났을 것 같아요. 


이해찬 :  목소리를 쓰는 사람에게 성대가 아프다는 건 끝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어요.  심지어 스스로를 의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노래도 못하는 나를 어떻게 사랑하지?’라는 그 고민이 제일 컸어요. 하지만 '섭리'라고 하죠. 만약 8개월 동안 봤던 오디션 200개 중에 다른 작품에 하나라도 붙었으면 <하데스타운>을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모든 일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오디션에 떨어지고) 매일 울던 그 시절은 눈앞에 문이 닫히는 시기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문이 닫힌 게 아니었어요. 지루하시겠지만 성대결절 걸린 일도 감사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문 하나가 닫힌다는 건 제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문 하나가 열린다’는 걸 깨달았어요.

사진 : 이해찬 배우 제공

황조교 : 문 앞에서 좌절하기도 하고, 문을 열어보기도 하면서 결국 <하데스타운> 투어 공연에서도 오르페우스로 무대에 오르셨습니다. 공연은 수만 가지의 약속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에너지를 교류하는 예술이잖아요. <하데스타운>의 ‘워커’로서, 또 주인공 ‘오르페우스’로서 관객들과 교류하는 에너지가 달랐을 것 같아요.


이해찬 : 워커’를 할 때는 ‘작품이 전달하는 거대한 스토리를 말할 수 있다.’에 자부심을 느끼고 관객들과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이 멋진 스토리를 관객들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요. 어쩌면 작품의 내레이터인 헤르메스**처럼 공연을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관객들에게) “넘어졌구나? 괜찮아.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는 오르페우스처럼) 한 번만 더  일어나 보자.”라는 메시지를 함께 부르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하고요. '오르페우스'로 연기할 때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배역으로 승화해서 관객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한 것 같아요. 


** 헤르메스(Hermes) :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전령의 신으로 <하데스타운> 속에서는 내레이터 역할을 겸하는 인물.


황조교 : 주연 배우의 삶은 관객들에게 작품의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지만 결국 누군가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잖아요. 배우께서 타인의 평가를 어떤 태도로 수용하려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해찬 : 저는 평가에 있어서는 밸런스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장 먼저 스스로에게  ‘네가 평가받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했니?’를 묻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오르페우스를 준비하면서 정말 칼을 갈았거든요.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면 오르페우스가 부르는 ‘Wedding Song’부터  마지막 곡인 ‘Doubt Comes In’까지 쭉 불러보고 잠들어요. 그럼 딱 새벽 2시가 돼요. 확실한 건, 그만큼 연습을 했으니까 저에 대한 믿음과 저를 뽑아준 스태프들과 팬들에 대한 믿음도 함께 따라오는 것 같아요.


또 모두에게 사랑받을 거라는 기대는 안 하고 사는 것 같아요. 이런 태도를 브로드웨이 주연 배우들한테 정말 많이 배웠어요. ‘마음에 안 들었구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피드백을 받을 때도 걸러야 될 건 걸러서 듣는 거죠.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보컬 코치와 감독 등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에요.

<하데스타운> 공연 사진 (이해찬 배우 제공)

황조교 :  브로드웨이도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시대의 변화’와도 빠르게 발맞춰 가야 하잖아요. 브로드웨이는 이러한 트렌드의 중심에 있고 해찬 배우는 그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해찬 배우에게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갖는 의미가 있을까요?


이해찬 : 뮤지컬이 재밌는 건 뮤지컬이라는 장르는 클래식과 대중음악 양쪽을 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산업이라는 사실입니다. 클래식한 요소도 가지면서도 현대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작품들을 계속해서 시도할 수 있는 곳인 것 같아요. 하지만 최근의 브로드웨이도 빠르게 변하는 경제 논리에 따라 작품의 주기가 많이 짧아지고 있습니다. 그것마저도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 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오픈런(*폐막 기간을 정해두지 않고 계속 공연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지금은 한국과 비슷하게 몇 개월 공연을 하고 폐막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황조교 :  혹시 한국 뮤지컬 무대에 오른 해찬 배우의 모습을 기대해 봐도 좋을까요?


이해찬 : 하고 싶어요. 물론 한국 배우 분들이 연기도 노래도 너무 잘하세요. 그럼에도 개인적인 바람은 인종차별을 당하지 않고 딱 한 번만 공연해보고 싶어요. 기분이 나빠도 설명하는 게 더 힘들어서 넘어가는 부분들이 많아요. 동료들도 문화가 다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많이 해요. 직접적인 건 아니지만 슬슬 긁는 느낌? 인생에서 한 번만 인종차별 걱정 없이 공연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도 한국에서 꼭 공연해보고 싶습니다.


황조교 : 지금 이 모든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해찬 배우의 행보가 작품 속 오르페우스의 발걸음과 굉장히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의심 속에서도, 고난 속에서도, 또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 자체가요. 작품에서도 ‘워커’들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게 ‘Show the way(길을 보여줘)’를 외치잖아요. 해찬 배우의 발걸음이 그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어떤 흔적으로 남았으면 좋겠는지 상상해 본 적 있으신가요?


이해찬 : <하데스타운> 캐나다 투어 공연을 봤을 때가 잊히지가 않아요. 공연을 보는 내내 ‘운명의 세 여신**’들 밖에 안보였어요. 제 머릿속에는 언제나 저 운명의 여신들이 있었으니까요. 다짐을 했어요. 내 머릿속에 있는 운명의 여신들을 없애야겠다.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공연을 봤던 기억이 나요.


** ‘운명의 세 여신(The Fates)' :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화 속 존재. 작품 속에서는 조언자 겸 인물들의 운명을 조롱하는 존재로 등장해 등장인물들의 결말을 암시한다.


오르페우스라는 역할이 전하는 메시지가 지금 제 인생에서 가장 필요했던 레슨이었어요. 제가 봤던 몇 백 개의 오디션, 오디션을 보고 나서 집에 와서 울던 제 자신이 결국 뒤돌아보고 좌절하던 오르페우스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헤르메스가 ‘But we sing it anyway(우린 그럼에도 다시 부르리)’라고 하잖아요. 


내가 사랑하는 직업이고, 내가 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울려 퍼져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계속 외치는 거겠죠. 단지 무대에서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행복해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반대로 언젠가는 다시 넘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지금 공연을 하면서도 넘어지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다시 일어날까?’를 먼저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다시 한번 이 노래를 불러 볼까?’, ‘어떻게 다시 한번 오디션장에 나가볼까?’에 대해 생각하는 거죠. <하데스타운>은 저에게 배우로서 정체성을 구축하게 해 준 작품인 것 같아요. 어떤 의심이 있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길 바랍니다.


황조교 : 힘든 상황 속에서 촛불의 붉을 밝히고 나아가는 해찬 배우의 모습이 비슷한 꿈을 바라보고 있는 많은 분들께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까요?


이해찬 : 오르페우스처럼 좌절하고 있는 혹은 에우리디케처럼 세상에 상처를 받은 분들에게 감히 어떤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길은 일어나야 보이는 것 같아요. 에우리디케 지하 세계로 내려갈 때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들어간 구멍만 엎드려 보고 있어요. 그런데 오르페우스가 다시 일어나서 계단을 올라갈 때 아까 말했던 닫혀 있던 문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한 번만. 한 번만 일어나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황조교 : 마지막 질문입니다. 배우 이해찬 그리고 인간 이해찬으로서 (극 중 오르페우스처럼) 잔을 들고 건배사를 외친다면 어떤 말을 건네고 싶으세요?


이해찬 : 오르페우스가 잔을 든다는 건 나누기 위해서 드는 거잖아요.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거 다 나눌 때까지 포기하지 말자.”

“갖고 있는 것을 모두 나눌 수 있을 때까지. (그것이) 나눔이 될 때까지”


뮤지컬 <하데스타운>의 마지막. 오르페우스를 제외한 모든 배우들이 잔을 올리며 공연이 끝난다 (사진 : 이해찬  제공)

** 이해찬 배우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tim_haechanle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