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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신작로(중정로)에 흩어진 기억들

by 노고록

서귀포의 중심거리는 그 옛날 신작로라 부르던 지금의 중정로다.

지금은 중정로가 서문로터리에서 서신교까지 1.3km를 얘기하지만 1970년~1980년대 당시 신작로는 초원다방 사거리에서 동문로터리까지 직선거리 500여 m로 지금의 반 정도다. 초원다방에서 서문로터리까지, 동문로터리에서 선경오피스텔까지는 건물들이 그리 많지 않던 때로 목적이 있어야, 아니면 그 동네 살아야 그 길을 다닐 정도의 낯설고 한적한 길이었다.


1960년대 이 길을 따라서는 남제주군청과 경찰서가 있었다. 초원다방 앞 사거리 모퉁이에는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도로변이 지금같이 서귀포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 주요 계기들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 신작로 윗동네인 뒷병디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사거리 모퉁이에 있던 초원다방은 서귀포 시내를 얘기할 때 늘 거론되는 일종의 랜드마크정도였다. 현대식 주상복합의 3층 건물로 제법 규모가 컸다. 1층에는 당시 드물었던 문구사와 빵집이 있었고, 2층에는 초원다방과 덕성원이 있었다. 이 건물의 주인인 친구네는 3층에 살았는데 한번 놀러 가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나의 첫 다방 나들이, 한복은 입은 다방 레지들을 보고 놀랐다.

초원다방은 어릴 적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가본 다방이다. 아마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이다. 누군가를 따라갔는데 잠시 다방에 들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성년자는 혼자 다방 출입이 안 되던 시절이라 예외적으로 보호자가 있는 경우만 가능했다. 딱 들어간 다방, 그리 크지 않은 실내에 명절도 아닌데 한복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이 여럿 있었다. 동시에 인사를 하는 모습에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동행한 분은 화장실을 간다고 나가 버리고, 잠시 내가 혼자 앉아 있게 되었다. 그 사이 한복을 입은 종업원이 엽차를 가지고 오더니 테이블에 놓으면서 내 옆에 슬며시 앉았다. 순간 당황하고 긴장했던 일은 지금도 다방을 얘기할 때 소환되는 추억이다. 아마 그때 맛있는 것을 사준다고 계란 노른자를 동동 띄운 비싼 쌍화차를 가져왔는데 입에 맞지 않다고 먹지 못했던 그리 유쾌하지 못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길거리 음악다방, 레코드가게의 추억


초원다방 바로 옆에는 80년 초를 전후로 꽤 큰 규모의 레코드 가게가 있었다.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바쁜 마음에 흥을 뿌려주던 좋은 기운의 가게였다. 레코드 가게는 아침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대형스피커를 문밖으로 내놓는다. 그리고는 하루 종일 음악을 크게 틀어 놓았다. 그 큰 음악소리를 하루 종일 들으면서도 주위에서나 길을 오가는 사람들 누구도 시끄럽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없었다. 음악을 듣는 게 그리 간절했던 시대였다. 노래는 레코드 가게 주인이 선곡하기 나름이다. 인기곡을 재생해 주는 경우도 있지만 레코드 가게에서 자주 틀어주는 바람에 인기곡이 되고 히트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오죽하면 길가에서 유행하던 음악의 순위라고 해서 길보드 차트가 생겨 났겠는가?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레코드가게에서는 나만의 플레이 리스트를 가진 카세트테이프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듣고 싶은 노래를 주섬주섬 메모했다가 15~20곡이 채워지면 레코드 가게에 녹음을 맡겼다. 그리고 다음날 가면 자기만의 플레이 리스트를 가진 테이프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레코드 가게는 나만의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기 위해서 종종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60대 중반을 넘게 살고 있지만 병원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그 정도로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는 얘기다. 부모님에게 감사하며 산다. 병원에 대한 잊지 못하는 추억이 2번 있는데 모두 이 거리의 병원에서다. 참 묘한 인연이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매일 치료를 받던 병원


1968년 국민학교 2학년 때다. 부모님도 집을 비운 어느 날, 친구들과 같이 신작로까지 놀러 나왔다. 부모님이 그토록 당부하던 신작로에 가지 말라는 지시를 어겼다. 당시 신작로는 차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넓고 크고 평편한 길이라 친구들하고 어울리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친구들과 달리기를 하다가 뒤쳐진 나는 뭔가에 부딪쳐서는 길가에 탁 쓰러졌다. 우체부 아저씨의 자전거였다. 아무런 통증도 없기에 일어서서 가려는데 왼쪽 다리 종아리 부분이 옆으로 튀어나왔다. 아프지는 않았는데 기분상으로는 이상했다. 우체부 아저씨가 보더니 다리가 부러졌다고 병원에 가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당시가 오후쯤 되는 시간이었는데 병원에 가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마 휴일이었던 것 같다. 우체부 아저씨의 자전거 뒤편에 타서 접골원을 갔다. 지금 이중섭거리 주차장 서쪽 건물이다. 그 장소의 기억은 선명하다.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니까 어린 마음에 다리를 못 같은 것으로 박아서 고정시키는 줄 알고 겁났던 기억이 선명하다. 다행히도 부목을 대서 고정을 시키고 집으로 왔다.


그다음 날부터 6개월여를 다니기 시작한 병원이 동산의원이다. 병원이 있던 곳이 신작로변 경찰서가 있던 건물로 기억을 한다. 위치상 그렇다. 입구에서 잘 정돈된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진찰실이 나왔다. 전체적인 기억이 예전 관공서를 들어가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나는 완전 골절이 된 상태라 어린 나이에도 치료를 하는 데는 한 한기가 꼬박 들었다. 의원급이라 입원이 불가능했기에 처음 몇 달 동안은 부모님이 매일 들 것에 들고 병원을 다녔다. 그 후 병원은 지금의 제주은행 옆 건물로 새로 현대식 건물로 지어서 이전을 하고 여기서 치료를 마친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임시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의 첫 슬픈 병원 추억이 이 길에 있다.


밴드부에서 기수 XX를 맞고 찾았던 곳..


두 번째는 1976년이다. 김문민의원에 대한 기억이다.

당시 병원은 초원다방옆에 있던 레코드사를 지나면 나오는 옛 남제주군청 자리에 있었다. 군청 입구와 앞 정원들이 그대로 있는 채 걸어 들어가면 진찰실이 나왔기에 관청이었음을 기억한다. 군청이 1호 광장으로 옮기고 꽤 오랫동안 그대로 건물을 이용했던 것 같다.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밴드부를 하고 싶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밴드부에 입성을 했는데 군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당시 밴드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누나를 잘 아는 분이라서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악기 배정이라든지 연습시간에 그게 좀 티가 났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트롬본 파트에 배정이 되면서 악장인 선배가 불만이 많았는데 어느 날 트집을 잡더니 날을 잡은 모양이다. 밴드부 전체를 모아놓고 군기를 잡는다고 학교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학교 인근 소나무밭으로 갔다. 당시 학교 주위는 온통 과수원과 소나무밭이었다. 그 속에 들어가면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는다. 소나무가지를 자르더니 돌아가면서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유명한 기수 xx다. 30명이 5대씩 때리니 버틸 수가 없다. 앉기는 고사하고 걸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엉금엉금 걸어서 찾아갔던 게 이 병원이다. 치료를 한다고 옷을 벗고 보니 엉덩이가 말이 아니었다. 그때 의사 선생님이 하던 말 "나쁜 X들하고는 상대하지도 말라"였다. 물론 그 길로 밴드부는 탈출했다.



둘 다 사고가 있었고, 이를 치료하는 과정이었기에 시기와 기억이 선명하다.

그런 만치 나에게는 잊지 못할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가끔 가는 길, 신작로였던 중정로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세월이 가고 물리적인 환경이 변하는 만치 우리의 상처도 사라지고, 치유됨 직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상처는 기억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 마음 깊이 남는다.

그러니 마음의 상처는 치유가 어려워진다.


우리가 살면서 명심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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