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과 우물
묵상일기(2024. 1.11)
창세기 26장 17-22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매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나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삭은 자신의 능력으로 열심히 얻어 놓고도
자기 것으로 취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했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지 않았을까? 우물을 파기만 하면 물이 나왔는데,,,
내가 이삭이었다면 굉장히 억울했을 것 같다.
리브가인 아내의 입장에서도 보면 이삭이 자기 실속 하나도 못 챙기고 다 퍼주고 오는 것처럼 보였을 것 같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내어 주고도 자신의 것을 챙겨 오는 것을 보니
이삭의 믿음이 대단해 보이는 시점이 이것 인 것 같다.
또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고 이삭에게 축복을 주신 것일까?
그런데 12절에 보면 이미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12절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남에게 다 퍼주고 또 우물 파고 또 퍼주고 또 우물 파고 파는 우물마다 물이 나오고…
신뢰관계, 아버지와 나와의 신뢰관계
그러고 보면 이삭은 아브라함,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결박하고 죽이려고 했을 때도 반항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아마 나의 상상이지만 생리가 끊어진 사라한테서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이삭에게
태어나서부터 늘 아빠와 엄마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컸을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로 네가 태어났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너는 태어날 수 없었다’라고
이삭도 크면서 나이가 많은 자신의 부모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했고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물론 믿음은 강권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그렇게 자신의 아버지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눈으로 몸으로 체험하며 컸을 이삭이었기에 우물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여유와 평화의 성품이 생겼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나는 질투심도 많고 욕심도 많다. 이삭의 모습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에 나의 모습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며 내 안의 내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질투심도 없고 욕심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의 착각이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말씀의 거울이 나를 비춘다. 어쩔 땐 부정하고 싶다.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나쁘지 않다고 우기고 싶다.
하지만 내가 우긴다고 해서 내가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럴수록 나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그리고 나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드린다.
이삭과 같은 평온함, 온전한 신뢰, 나누어 줄 수 있는 긍휼함 이런 믿음을 나에게도 부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