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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지는시간 Nov 26. 2015

고모이야기


나에게는 청각장애자인 고모가 한 분 계신다

어렸을때 논일,  밭일 하던 할매 등에 업혀 있다가 밭에 떨어져서 경기를 했는데

침을 맞고 난 이후 듣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내가 어렸을때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이 되면 가난한 집 입하나 줄여보겠다고 엄마는 나와 언니를 교대로 할머니 집으로 보내곤 했다.


할매집에 가면 항상 말못하는 셋째고모가 세상에 다시 없을 선한 얼굴에 박꽃같은 소리없는 웃음으로 나를 반기며 거두어 입히고 먹여주었었다.  그래봤자 고모는 오빠보다 서너살 많을 뿐이어서 사실 지금은 우리랑 같이 늙어가는 입장인데 말이다.


단발머리 여중시절이던가

여름방학때 막내고모,  언니,  나,  그리고 셋째 고모랑 여름사과 따러 과수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여물로 쓸 요량으로 강가옆 무성하게 자란 풀섶에 들어가  풀을 베며 돌아오고 있었는데 장마로 인해 강물이 불어나 풀섶이 물에 잠겨 군데군데 길이 끊겨 있어 그런 길을 뛰어 넘어야 했는데 고모들 손에는 낫을 들고 있었더랬다.


그 중 가장 어린 내가 세번째로 찰박거리는 물웅덩이를 뛰어 넘고 난 뒤에 셋째고모가 낫부터 먼저 풀섶으로 던져 넘겨주고 난 뒤 뛰어 넘어야 하는데 고모가 수화로 나를 보며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그 수화를 통역해 줄 막내고모는 울언니와 저만치 앞서 가고 없었다.


내딴에는 고모가 뛰어 넘다가 미끄러지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건너편에 낫을 들고 선 채 고모의 수화를 알아듣지도 못하고 서있다가 결국 고모가 내가 들고 있던 낫에 손을 크게 베이고 나서야 고모가 하려 했던 말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낫의 방향을 잘 못 쥐고 있었는데다가 그게 내 손에 있다는 것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뛰어 넘어오는 고모를 잡으려 했던 바람에 고모는 크게 손을 다친거였다.

나는 놀래고 미안한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내자신에 화가 나서 바보같이 서 있기만 했는데 고모는 자신의 속옷을 북 찢어 베인 손을 묶고 있었다.


나는 그때 그일이 오십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아 셋째 고모를 간혹 만날때 마다 마음이 짠하고 뭉근하다.


그 고모가 같은 청각장애인 고모부를 만나 결혼을 하고 더 이상 자주 볼 수 없게 되었다가 내가 결혼 한 후 첫아이를 낳고 키울때  다른 고모들과 처음으로 고모가 살고 있는 집으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고모는 수박하우스를 크게 하고 있었고 마늘농사에 양파농사에 소도 수 십 마리 키우며 잘 살고 있었지만 그 큰 살림을 하느라 고모는 많이 야위어 있었고 늙어 있었다.


그렇게 큰농사를 하느라 힘들면서도 셋째 고모는 지금까지도 때만 되면 -엄마아버지 일찍 여의고 애처로운- 조카인 우리 사형제까지 챙겨  마늘이며 양파며 보내 주신다.


아버지 기제사에 한번씩 오셔서는 다른 고모들과 작은아버지와 어울려 왁자한 시간을 보낼때 고모는 큰방에 앉아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멀거니 보고 계시거나 농삿일에 지쳐 누워계신다.


저렇게 따수븐 고모에게 나는 달리 뭐라고 표현 할 방법이 없어 고모 앞에서 손짓 발짓으로 몇마디 대화를 하다가 물러난다.


고모의 표정은 종종 까마득히 먼 곳으로 떠도는 듯 하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에게도 내 맘을 내가 다 전달 할 수 없는데 고모는 오죽했으랴

고모가 낳아 기른 자식들 마저도 수화로 통하지 않으면 다 전달되지 않을 단절감을 수 도 없이 겪었을

짐작으로도 짐작되지 않을 고모의 철저한 외로움.. .


나는 소망한다

고모가 다음 생에는 들에 핀 쑥부쟁이로 태어나더라도

바람에  같이 흔들리기를,  떨어지는 비에 함께 춤추기를,  뿌리나 줄기가 함께 뒤엉켜 있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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