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앤 ANNE>
2023년의 첫날이 밝았다. 날짜를 적을 때 쓸 숫자 하나만 바뀐 것뿐인데도, 괜히 마음을 최대한 새롭게 단장하고 싶은 그런 날이다.
작년 이맘때쯤 한창 공연 중이던 뮤지컬 <앤 ANNE>은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에 꼭 들어맞는 작품이었다. 사람들이 연말연시에 보기 참 좋은 극이라며, '앤말앤시'라는 별명을 붙여줬을 정도로 말이다.
뮤지컬 <앤 ANNE>은 두 가지의 독특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극중극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연극 동아리의 일원으로, 소설 <빨강 머리 앤>을 연기하게 된다. 두 번째는 그 극중극의 특징으로, 세 명의 학생이 하나의 배역인 '앤'을 돌아가며 맡게 된다는 점이다.
그중 두 번째 특징인 세 명의 앤에 대해서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앤 1은 초록 지붕 집에 오기 전에 앤이 겪었던 일부터 매슈, 마릴라, 린드부인과 친해지기까지의 이야기를 담당한다.
가장 에너지 넘치고 쾌활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랑을 받은 경험이 없는 앤이기에 가장 막무가내다. 부모님을 잃은 이후 여러 집을 돌아다니면서, 희망을 품고 실망한 경험을 가득 겪었기 때문에 미래를 기대하면서도 불안해하는 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길의 끝에는 집이 있을까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나의 집
/ M2. 이 길의 끝앤 中
이어서 앤 2는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를 넓혀가며 가족의 사랑뿐만 아니라 친구와의 우정에 대해서 배우는 부분을 연기한다.
처음으로 또래인 다이애나와 친구가 되기도 하고, 처음 간 학교에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칭찬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길버트를 만나 갈등을 겪는 장면도 나온다.
그대여 나의 친구여
나는 그대를 잊지 않겠나이다
/ M11. 그 앤 못 말려 1 - 포도주 사건 中
앤 3은 그 이후 점점 더 성장하며 어른스러워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주변은 이미 앤을 좋아하고, 또 그를 인정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앤은 의젓하게 퀸즈 학교에 진학하기도 하고, 길버트와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기도 한다.
난 빨간 머리 앤
실수 투성이는 잊어
난 숙녀가 될 거야
/ M14. 난 빨간 머리 앤 中
왜 굳이 세 명이 돌아가며 앤을 연기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이 공연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누가 앤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시놉시스에서 나온 질문처럼, 100년도 더 된 소설 <빨강 머리 앤>이 아직까지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달리 말하면 그것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뮤지컬 <앤 ANNE>은 이 이야기를 접하는 우리 모두가 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의 그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불안을 느끼는 앤 1, 여러 관계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는 앤 2, 서툴지만 점점 성장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앤 3의 모습은 삶을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라도 스스로와 어느 정도 닮아있다고 느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앤을 둘러싼 사람들 - 매슈, 마릴라, 린드 부인, 다이애나 등 - 과의 공통점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누구나 앤이 될 수도 있고, 앤의 주변인이 될 수도 있다.
세 명의 앤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가 함께 "내가 앤이야, 우리가 앤이야"라는 가사를 부르는 걸 보면, 그 메시지를 더욱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
시놉시스를 읽어보면 학생들이 <빨간 머리 앤>에 대해서 탐구하며 학습하는, '연극 동아리'로서의 정체성이 강조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딱히 그런 극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연습을 한다."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사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바로 앤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특히 도입부를 지나 극중 학생들이 각자의 역할에 맞게 의상을 갖춰 입으면서부터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극중극이라는 설정이 티가 나는 지점은 두어 개 정도 말할 수 있다. 먼저 연극 소품이다. 극의 도입부까지는 학생들이 체육복 위에 치마 정도만 대충 걸쳐 입고 나와서 연극 연습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배경을 구성할 때도 동아리처럼 아기자기한 소품이 등장한다. 말발굽 소리를 내기 위해 손뼉도구를 직접 사용하거나, 길버트가 석판에 맞는 장면에서 어질어질한 상태를 별모양이 붙여진 플래카드로 표현하는 등 배우들이 소품을 꺼내서 직접 움직이며 연기한다.
다음은 바로 길버트다. 공연을 보면, 앤의 역할을 주고 받을 때를 제외하면 인물들이 자신이 극 안에 있음을 티내는 대사가 전혀 없다. 그러니까 관객의 눈 앞에 있는 배우들은 각자 '앤'과 '매슈', '마릴라', '린드 부인', '다이애나'를 연기하고 있지 '그들을 연기하는 학생들'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유일하게 티내는 사람이 길버트다. 길버트는 등장할 때 캐치 프레이즈가 있다. "나는 길버트 브라이스! 남자 주인공이죠." 개그 요소로 꾸준히 언급되는 듯한 길버트의 '남자 주인공' 인식은 관객들에게 이 뮤지컬의 형식적 배경을 상기시켜준다.
이렇듯 연극 동아리의 설정은 앤 1, 2, 3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주면서, 뮤지컬 <앤 ANNE>의 소소하면서도 다정한 매력을 더욱 키워준다.
우리와 닮은 앤의 이야기는 "희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조금 제멋대로일지라도 그 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사랑스러울 수 있음을, 언제나 진심을 다하면 반드시 그 마음이 전해질 수 있음을, 불안하고 흔들려도 조금씩 단단해질 수 있음을 앤 1, 2, 3이 차례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난 빨간 머리 앤
실수투성이 말썽꾸러기지만
그걸 감추고 싶진 않아
실수 않으려 노력하면 돼
/ M1. 내가 앤이야 中
맞아요 저 길모퉁이를 돌면
또 다른 슬픔이 있을 거라고
상상했었죠 그래서 두려웠었죠
하지만 이제 알아요
살아가려면 저 길 모퉁이
언젠가 만나게 돼 있죠 피할 수 없어요
저 길 모퉁이를 돌면
분명 좋은 일이 펼쳐질 거라고
이제 난 믿어요 용기를 내어봐요
/ M16. 저 길모퉁이 앤 中
큰 갈등 없이 마냥 사랑스러운 공연이다. 통통 튀는 넘버들은 극의 그러한 분위기를 살려주는 발랄한 음으로 구성되어 있고, 희망찬 가사로 가득 차있다. 어떤 곡은 재치 넘치고, 어떤 곡은 감동을 준다.
극단 걸판의 뮤지컬 <앤 ANNE>은 돌아오는 2월, 예그린씨어터에서 6연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따스한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한 번쯤 보러가길 권해본다.
2023. 01. 01.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