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뮤지컬 <브론테>와 라이선스 뮤지컬 <웨이스티드>
지난 2022년 하반기에는 같은 소재를 다룬 두 개의 뮤지컬이 나란히 대학로에 등장했다. 두 작품 모두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브론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때 '브론테'들의 이야기란, 그들이 만들어 낸 소설이 아니라 작가 본인들의 삶을 뜻한다.
브론테의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폭풍의 언덕>이나 <제인 에어>라는 소설의 제목은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소설들을 어릴 적 만화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와 또래라면 아마 꼭 한 번쯤 읽어봤을, 손바닥만한 크기의 만화 시리즈가 있었다.
언급한 두 작품의 작가가 각각 에밀리 브론테와 샬럿 브론테, 즉 혈연으로 묶인 자매 관계라는 사실을 안 건 만화를 읽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지만 말이다.
오늘은, 어른이 된 내가 대학로에서 만난 브론테들의 이야기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활자들이 질주한다
하얀 벌판을 가로지르며 내달린다
문장들은 찬란하다
풀려난 고삐처럼 마구 춤춘다
- 넘버 '글쓰기에 미친 인간들' 中
뮤지컬 <브론테>는 지난 9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되었던 국내 창작 뮤지컬이다. 해당 작품은 세 명의 브론테(샬럿, 에밀리, 앤)가 작가로 남기 위해 노력했던 일련의 과정과 세 자매의 우애를, 약간의 판타지적 요소와 함께 그려낸다.
여성에게 주어진 유일한 의무가 가정에 충실하는 것이었던 빅토리아 시대에, 브론테 세 자매는 글쓰기를 유일한 탈출구로 여긴다. 누군가의 어머니도, 부인도 아닌 한 명의 작가로서 세상에 남고자 했던 샬럿, 에밀리, 앤은 책을 내기 위해 한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가고, 이때 그들 앞으로 발신자를 알 수 없는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그 편지는 미래에서 온 듯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발신자는 샬럿에게는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잃기 전에 오만한 태도를 버리라는 경고를, 에밀리에게는 비난이 쏟아져도 멈추지 말고 계속 자신만의 글을 쓰라는 응원을, 그리고 앤에게는 앤만이 자신의 정체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자신은 작가로 남지 못할까봐 초조해하는 샬럿과 신비로운 누군가의 믿음으로 자신감을 얻은 에밀리는 각자 끊임 없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앤은 완전히 변해버린 집안 분위기에 의아함을 느끼면서, 조금은 느리더라도 자신만의 결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에밀리는 파격적인 내용의 '워더링 하이츠'를 완성하고, 이를 계기로 샬럿과 에밀리 사이의 갈등이 더욱 심화된다. 이후 편지를 보낸 이의 정체가 서서히 밝혀지면서 브론테 세 자매의 예술가 정신, 그리고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끈끈한 가족애에 대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눈 뜨면 지독한 아침
오늘도 지독한 하루
한 줄기 빛조차 없는 곳
답답해 이 하워스
- 넘버 '하워스에 갇혔어' 中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영국 라이선스 뮤지컬로, 지난 12월 국내 초연이 시작되었다. 이 작품 속에서는 하워스의 낡은 목사관에 살았던 네 명의 브론테(샬럿, 브랜웰, 에밀리, 앤)가 각자의 기구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다면 결국 헛된(wasted)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웨이스티드>에는 <브론테>에서 다루어진 세 명의 인물과 더불어 한 명의 브론테가 더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브랜웰 브론테로, 4남매 중 둘째다. 그는 글, 그림, 음악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을 보였지만 미완의 예술가라는 인물 설명처럼 단 하나의 작품도 완성하지 못한 채 아편과 알콜 중독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제인 에어'를 남긴 샬럿, '폭풍의 언덕'을 남긴 에밀리, '아그네스 그레이'를 남긴 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해당 작품은 브랜웰이 겪는 사랑의 실패와 방황부터, <브론테>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샬럿의 옳지 못한 사랑, 에밀리의 투병, 앤이 겪는 혼란 등 처절하게 삶을 살아가는 브론테의 이야기를 '록' 음악을 통해 그려내는 다큐멘터리 뮤지컬이다. 본 공연은 2023년 2월 26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브론테가 살았던 시대에서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가 새삼 그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나는 두 작품이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브론테의 인생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다. 누군가는 나와 다른 생각을 할 테지만, 어느 쪽도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무엇도 마냥 헛된 건 없다는 것.
다름이 틀림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정말 그렇게 여겨지지는 않는 시대에 지금 우리가 존재한다. 이럴 때 <브론테>와 <웨이스티드> 속 브론테들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2023. 01. 15.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