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띵 에브리웨어, 그리고 '올 앳 원스'
얼마 전, 양자경의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소식을 들었다.(사실 유튜브에서 봤다.) 두유 노 먹방? 두유 노 김치의 질문을 하는 많은 이들과 동일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물 밀듯 밀려오는 같은 아시아인으로서의 뿌듯함과 감동... 웨이브에 양자경 수상 축하 기념으로 '에에올'을 스트리밍한단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리모컨부터 잡았다. 이런 취향이 아닌 듯, 뜻뜨미지근한 표정의 남편(가세요 그럼..)과 멀뚱멀뚱한 강아지와 함께 일단 기대 반 / 건조함 반으로 영화를 보았다.
영화 시간 30분이 지났을 때, 나와 남편의 표정은 어리둥절에서의 그 어리와 둥절을 맡게 되었고, 40분이 지났을 땐 어어? 였으며 영화가 끝나갈 즈음엔 오열 파티를 하고 있었더란다. 영화 속에는 어떠한 연기 구멍도 없었고, (심지어 카메오로 출연한 감독들마저 꽤 괜찮았다.) 왔다 갔다 난리를 치며 난리법석을 떠는 영화 속 타임라인과 범접도 못할 '멀티' 유니버스를 오갈 때의 화려한 화면 속 이펙트들이 머릿속을 헤집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한 편의 휴먼드라마이다.
영화 속의 양자경, '에블린'은 모든 멀티유니버스 속에서 가장 실패를 많이 한- 어떻게 보면 최악의 인물이다. 다른 세계관의 에블린은 성공한 무술배우이기도 하고, 손가락 하나로 무림을 재패한 고수이기도 하며, 성공한 요리사이기도 하다. 다만 이 영화의 주체인 프로'실패'러인 에블린은 망해가기 일보 직전인 세탁소를 운영하며 혼돈스러운 상황의 딸, 묵묵한 아버지, 그리고 이혼 서류를 품고 사는 남편과 살아간다. 다른 세계 속 알파 남편의 등장으로 그녀의 가족, 인생의 전반이 모두 위태롭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줄거리는 여기까지 하고 다들 그냥 영화를 보시라. 그 외에는 설명할 수 없다. 내 능력이 딱 거기까지다.
이 영화의 가장 근본적인 중심은 에블린과 조이이다. 엄마와 딸. 그 미묘한 애증과 사랑의 관계가 영화 속 이야기를 한 계단씩 밟아가는 주체이다. 조이의 완전체인 '조부 투바키'는 동양인 부모의 모든 악몽을 재현해 냈다. 과감한 탈색머리에 또라이 같은 아웃핏, 어설프고 조잡한 문신, 동성애 등등... 부모인 그들도 내키진 않지만 용인하고 살아간다. 그런 조이에게서 20대의 나를 보았고, 그때의 나에겐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들이 지옥 같기도 했으며 너무 벅찼던 일들은 또 아무렇지도 않았다. 불같이 타올랐다가도 물처럼 잠잠해지다가 침울해지기도 하고, 형체가 없는 그것들을 원망해보기도 했다.
30대의 나는 에블린과 조이의 중간 선상에 있다. 애매모호하게 철부지인 딸이자, 엉성하지만 주관은 뚜렷한 아줌마가 됐다. 에블린처럼 아이는 갖지 않았지만, 어찌 됐든 가정을 만들었고 혼돈의 20대를 막 벗어나 어설픈 TPO를 갖춰 뚝딱거리며 살아간다. 어릴 때의 난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고, 홀(HOLE)의 멤버가 되고 싶었으며, 잘 나가는 영화감독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난 꿈꿔왔던 그 어떤 것도 되지 않았다. 갈망은 갈망일 뿐, 저 꿈들을 이루기 위한 그 어떠한 노력도 노선도 결국 내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의 나도 사랑하려 한다. 어쩌면 수도 없는 무한의 실패들 중 그나마 좀 나은 선택지를 고른 '나'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남편인 웨이먼드, 영화 후반부의 독백하듯 에블린에게 읊어주는 본인의 마음속 이야기를 듣고 나나 남편이나 그냥 눈물만 펑펑 흘려보냈다. '저 미친놈...'을 남발하는 에블린이 항상 궁금해했던 웨이먼드의 우유부단함과 상냥함, 가끔 열 뻗치도록 답답한 그 선함을 가장한 미련한 태도도, 내가 그에게 매일 품는 의문 그 자체였다. '넌 왜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입 밖에는 내지 않았던 무언의 질문이었다. '이게 내가 세상과 싸우는 방식'이라는 웨이먼드의 대사가 그런 의문을 후벼 팠다. 거칠게, 무조건 득달같이 우기고 따지고 얻어내며 살아온 나와는 다른 그만의 세상 사는 방식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꿈을 이뤄낸 사람들을 제외한 우리 모두는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형편없이 무지하거나 다분히 평범하니까! 금년에 이 영화가 어떠한 촉매가 된 건지 이것저것 들쑤셔보며 노선을 찾아보고 있다. 이 노선들이 다 오래되어 다 망가지고 조잘날꺼라 해도 일단 하나씩 뚫어보고, 그다음에 후회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