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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변 Nov 08. 2024

중고로 산 책이 너무 깨끗하다구요?

며칠 지나 보면 이유를 알게 됨

‘개똥이네’(www.littlemom.co.kr)라는 중고책 거래 사이트가 있다. 주로 아동도서, 특히 전집류가 활발히 거래된다. 당근 같은 세련된 앱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개똥이네‘의 투박한 인터페이스에 움찔할 터이나, 몇 번 써보면 이 사이트의 매력을 알게 된다. 아이 옷과 마찬가지로 아이 책도 몇 번 안 읽고 다음 단계의 책으로 바꿔줘야 할 때가 많은데, ‘개똥이네’에 들어가면 다양한 아동도서가 제법 싼값에 올라와있기 때문이다. 전집류는 깨끗이 잘 보고 나서 다시 팔 수도 있다.


아무튼, 아들에게 사준 중고책들은 대체로 잘 읽고 본전을 뽑았다. 하지만 매번 성공적이었던 건 아니다.


<삼국지>만큼 재미난 이야기도 잘 없는데..
교원 <눈으로 보는 중국고전> 시리즈 총 43권 중 일부

풀빵이 제법 글밥 많은 이야기책들을 읽기 시작하자, 뭔가 엄청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게 해주고 싶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긴 호흡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펼치며 다음 권이 궁금해서 잠을 설치게 하는! 나관중의 <삼국지>가 바로 그런 이야기 아닐까? 제갈량이 막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척하)고! 조조의 백만 대군이 불타고!


갑자기 그 옛날 삼국지 읽던 시절의 흥분에 사로잡힌 나는 곧바로 ‘개똥이네‘를 뒤져 20권짜리 아동용 삼국지를 주문했다. 정확히는 삼국지(20권), 수호지(10권), 서유기(10권), 별책(3권)으로 구성된 교원 <눈으로 보는 중국고전> 총 43권을 3만 6000원에 구매했다. 판매자 코멘트는 아래와 같았다.

기둥 빛바램 살짝 있지만 책상태 좋아요~
받아보면 만족하실거예요~


과연 받아보니 새책이라 해도 믿을 만큼 책 상태가 좋아서 만족스러웠다. 두 박스 가득 정성스럽게 포장된 책들을 꺼내보면서 어찌나 뿌듯하던지. 이걸 이 값에 득템하다니 나 너무 잘했는걸?

그림도 이렇게 멋져서 가슴이 웅장해지는데...


...그러나 이 중고책이 ‘새책처럼 깨끗한’ 이유를 깨닫는 데는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


풀빵은 1권을 읽다가 실망한 목소리로 “재미가 없어.”라는 평을 남긴 뒤 다시는 열어보지 않았다. <삼국지>인데 재미가 없다니 말이 되냐? ..라며 내가 읽어주려고 펼쳐봤다가 곧 수긍했다. 재미가 없다. 글밥이 많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방대한 소설을 기계적으로 축약해 놓는 데 급급하여 이야기의 리듬이라는 게 없는 느낌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어릴 때 봤던 삼국지는 TV 애니메이션이었고,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읽으며 가슴이 웅장해졌던 건 고등학생 때였다. 아들아 미안. 나중에 커서 재미있는 버전으로 읽으렴.)


이 책이 우리집에 오기까지 몇 명의 어린이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 중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어린이는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집에 몇달 꽂혀있던 이 책은 조만간 다시 ‘새책처럼 깨끗한‘ 상태로 다른 어린이 손에 들어갈 수도 있겠다. 개똥이네 사이트를 통해 방문매입을 요청하면 중고판매업체가 견적을 보내온다. 안녕, 책들아. 그렇게 몇번 돌다 보면 너에게 잘 맞는 독자를 찾을지도 몰라.


엄마, 이 책 이상해!
은하수미디어 세계명작 시리즈 중 <오만과 편견>


풀빵의 짜증난 목소리를 듣고 대체 무슨 책인가 싶어 가봤다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어떻게 각색하더라도 초3 남아가 재미있게 읽을만한 책은 아니다. 게다가 다아시가 미소년 아이돌 가수처럼 그려져 있다. 옆엔 왕방울눈의 미소녀 엘리자베스가 수줍게 볼을 붉히고 있고...


은하수 세계명작 특유의 일본 애니스러운 삽화에 관해서는 전에 쓴 글이 있으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개똥이네'에서 이걸 열여섯 권 묶어 6만 8000원에 팔길래 그냥 사버렸는데, 그중에 <오만과 편견>도 있었던 것이다.

츤츤거리는 미소년 다아시(좌). 내 머릿속의 다아시(우)와 갭이 너무 큰거지..


- 풀빵: 이상해. 사촌인 콜린스와 결혼한대.

- 나: 사촌끼리 결혼하는 나라도 있어.

- 풀빵: 사촌 콜린스가 재산을 다 물려받는다는 게 무슨 뜻이야?

- 나: 옛날 영국에선 여자가 재산을 물려받을 수가 없었대.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엄마나 딸들이 아니라..(중략)..그래서 딸들 중 한명이 남자 사촌이랑..(중략)..이제 이해되지? 엄마 생각에 이 책은 지금은 재미없을 테니 다른 거 보자.


과연 풀빵이 커서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까? 글쎄. 남편도 <오만과 편견>은 재미없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볼 때마다 새삼 느끼는 것은, 여심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어떤 요소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놀랄 만큼 비슷한 모습을 띤다는 점이다. 또 엄마 혼자 귀요미 버전 <오만과 편견>을 재미지게 읽는 동안 풀빵은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실컷 봤다.


그래도 자꾸 사봐야 알지

이책 저책 사다 보면 가끔 잘 안 맞는 책을 사게 될 때도 있다. 그렇다고 안 살 수도 없으니 값이라도 싸게 사려고 더더욱 ‘개똥이네’를 기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이왕이면 전 주인도 여러 번 즐겨 읽은 손때 묻은 책이 오길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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