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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환 관찰일지 (2)

이번 글에서는 일지(1) 말미에 언급하였던 공부하기싫어병 1기 환자의 경과를 계속하여 기술하겠다.

환자의 경우 회사가기싫어병 항원 미보유자로서 백신이 투여되지 않은 상황에서 회사가기싫어병에 감염되었다. 두 질환이 동시 발병할 경우 각각의 증세가 혼합되어 나타나거나 그 빈도가 상승할 것이라 추측했는데, 복합질환의 증상은 추정한 것보다 심각했다. 그는 아래와 같이 자신의 증상을 설명했다.



하나, 공부를 제외한 모든 것이 흥미롭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칼 마르크스의 비밀스런 부분을.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스미스의 국부론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배경은 알았을테지만, 마르크스가 정자왕이었음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는 여섯명의 아이들을 가졌고, 그 중 셋은 어린 시절 죽었다고 한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권위적 성격이 사도마조히스트와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 흥미롭지 않나요?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무력감을 견디지 못해서 그들에게 굴복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설정한 '우리'에 편입되고 싶지 않았다)


하나, 사랑 불신론자가 됩니다. 문장 하나 써내려가지 못하는 자신의 가치가 무엇인지 곱씹어보다가 자괴감이 깊어지고 자괴감이 깊어지니 나라는 인간을 누가 사랑해줄지 의문이 듭니다. 나를 제일 잘 아는 나라는 인간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지경이 이르렀는데 말이에요. 사랑은 없어요.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갈구하는듯 했다)


하나, 과거를 사랑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랑과는 조금 다른 의미임을 전제로 합시다. 그럼 용어 자체가 달라져야 할까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과거를 추억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사랑보다는 집착이 의미에 가깝겠네요. 그간 읽은 연구들을 정리하려고 전자파일들을 모아놓은 폴더를 살펴보다가 당시의 내 생활까지 보게 되었어요. 그때 내가 어딜 갔는지, 누굴 만났는지, 무얼 먹었는지, 하늘의 색깔이 어땠는지,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었었는지가 보이더라고요. (그는 이 시점에서 천장을 한번 바라본 후 큰 숨을 쉬었다) 제가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서는 내가 한숨이 나왔다)


나는 환자에게 이곳은 공부하기싫어병에 대한 임상연구가 목적임을 명확히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리가 불안정한 원인과 그 정서적 반응에 '사랑'이라는, 본 질환의 근본과 무관할 것 같았던 요소가 섞여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치료의 방향이 전통적 싫어병 요법과 달라지게 될 것이라고 짐작하는 첫번째 계기가 되었음을 이번 일지에 기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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