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내원한 지 3개월이 지났다. 지난 면담에서 그는 자신의 어려움을 스스로 이겨나가겠다고, 즉 더이상 의학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언급하였다. 그러한 결심사항에 대해 의료진은 환자의 의향을 존중한다고 밝히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적 소견이 첨가될 여지가 있을지 조심스럽게 확인한 바 있다. 약물치료 이후 운동치료를 받은 전력이 있으며 해당 요법들이 환자에게 적합하였기에 '마주하기 요법'을 제시해 보았었다. "어려움을 넘고overcome 싶습니까, 묻고bear 싶습니까?" 그리고 선택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지난 1월, 그는 어려움을 묻는 작업을 수행했다고 진술하였다. 우리가 의도했던 bear의 의미와 너무나도 합치하게 그는 고통을 grin and bear 한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환자의 내면에 묻힌bury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2개월 가량 그는 고통을 기억에서 휘발한 채 살아간 것으로 보인다. 고통이 원래 자신에게 없었다는듯 언급하는 것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생글거리는 표정과 장난이 묻어나는 말과 과도한 제스처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그것'은 정말 사라진 것일까? 나는 강한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정말 고통에서 벗어난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일지 모른다. O와 H2O처럼 특정 번호를 가진 원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은 감정이나 감각이 아닌 우주의 본질은 아닐까? 즉, 고통이라는 특수한 원소가 존재하고 그것이 우주의 에너지로 기능한다면, 건강한 관계나 건강한 정신, 건강한 몸 등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요 조건이 아닌 것이 된다. 수반될 수밖에 없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조정이 가능할 뿐이다. 말 그대로 고통이라는 원소가 집합된 공간의 경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며, 공간 내 해당 물질의 밀도를 조절할 수 있을 뿐이다. 혹은 자아가 경계 밖으로 온전히 사라짐으로써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아픈 닭은 닭장 안에서 아픈지 몰라요. 왜냐하면 다들 아프기 때문이에요. 닭장 밖을 나간 닭은 그제야 깨달아요. 아, 내가 아프구나.
그러니 우리, 닭장으로 돌아갑시다.
우주를 닭장 혹은 인간으로 치환하여도 이 규칙은 동일하게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