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까지 살았는가
거실 탁자에 놓여있는 책이 눈에 띄었다. '인생의 중간쯤 왔다면 당신은 책상을 정리해야한다' 아마도 아빠가 읽고 있었나보다. 참 웃긴 말이다. 인생의 중간쯤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느 누가 가늠할 수 있는것인가?
50대 후반인 엄마는 분명 인생의 절반쯤 살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요즘은 60대도 청춘, 70대도 청춘이라며 예전같지 않다고 했다. 확실히 나도 느꼈다. 60대면 할머니일 것만 같았는데 요즘은 그냥 아저씨, 아줌마같다. 100세시대라며 매체에서는 떠들어댔다. 시대가 변하면서 과학은 발전해 모두가 평균 수명이 늘었으며 고칠 수 없는 병은 없을 것만 같이 말했다. 나는 어쩌면 그 바보같은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던 것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허무하게 일하다가 쓰러진채로 의식 한번 돌아오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이런 일이 닥칠줄만 알았다면 엄마는 평소같이 일을 하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가족을 돌보느라 친구가 별로 없었다. 대신 엄마는 우리를 위해 일을 해야했다. 직장동료들은 엄마를 좋아했다. 엄마의 비보를 전할때, 엄마의 일명 '짝지'라던 동료분은 '너희 엄마가 워낙 낙천적이잖니' 라고 전화기 너머로 말했다. 그렇게 낙천적이고 활기차고 명랑하던 사람이 떠나갔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엄마는 평소 가족을 잘챙기는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가족을 끔찍하게 생각했다. 엄마는 년마다 건강검진을 받았고,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도 받으면서 자잘한 병들이 발견되고 치료하고 그렇게 평생을 살 것만 같았다. 요즘은 암이 발견되어도 치료가 가능해서 완치도 된다는데 세상에 원망만 했다. 왜 하필 머리 CT를 찍어야만 알수있는 뇌출혈이었을까. 왜 하필 다 함께 있는 주말이 아닌 평일에 일하다가 쓰러졌을까. 왜 하필 엄마였을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 일을 부정하고만 싶었다.
건강을 챙긴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모든 것을 챙기는 일이 아닐까. 지긋한 일상도 너무나도 그리워진 지금은 건강의 무서움을 몸소 느끼고 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끔찍하게 시리고 차갑던 병원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는 기억들을 우리는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 아직도 뇌라는 단어를 들으면 심장이 쿵하고 저 먼 지하 밑 바닥으로 내려 앉는다.
20대 초반인 나도 어쩌면 지금이 인생의 절반일지도 마지막 쯤일지도 모른다. 인생을 놓고 싶을때도 있었다. 이번에 깨달은게 있다. 나에게, 모두에게 인생의 마지막에 다온 것 처럼 살아야 한다. 더 이상의 후회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표현하기를, 모두가 무탈하게 인생을 살아가기를, 평범한 일상이 주는 행복을 몸소 느끼기를,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받아들이기를, 그들이 모두의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를 펼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