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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랑 Nov 20. 2023

유난히 힘들었던 날도

"손님, 한국분이신가요?"

딱 봐도 중국사람처럼 보이지만, 절대 먼저 중국인이냐고 묻지 않는다. 중국인을 한국인이 한국인이냐고 오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감이 없지만, 한국인을 한국인이 중국인으로 오해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첫 만남에서 상대를 나와 같은 소속으로 인식할 때 대체적으로 분위기가 좋다. 그러니 중국여권을 손에 들고 있고 중국어를 솰라솰라 하고 있어 100% 중국인이 확실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한국사람이냐고 물어본다. 언제 어디서 예민한 사람을 만날지 모르니.

"중국"

손님은 자신이 중국사람이라고 말은 하지만 한국어로 대답을 한다. 이런 경우는 한국어를 잘 아는 중국인이거나 99% 조선족이고, 이 둘은 발음으로 구분이 된다.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연길, 길림, 하얼빈 쪽으로 비행을 가면 중국인 손님의 대부분은 조선족이다. 입국카드와 세관신고서(지금은 없어졌지만)를 드리려고 하자 그들은 또 말한다.

"우리말로 줘, 한어로"

‘……?!’

그들이 말하는 우리말은 무엇일까? 그들이 지금 쓰고 있는 한글, 우리말 큰사전의 우리말일까, 아니면 중국인의 우리(중국) 말일까 늘 의문이다. 중국어로는 중국어도 '한어'고 한국어도 '한어'다. 난감하다. 그들의 한국어는 북한말에 가까운 억양이고, 쓰지는 못한다. 하지만 내가 중국어로 말을 하면 못 알아듣는다. 4년 배운 내 중국어가 원어민이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닐 텐데. 중국어로 달라는 거라고 생각해서 중국어 서류를 내밀면 어떨 때는 끄덕이며 받고, 어떨 땐 '이거 말고 우리말'이라면서 한국어를 가져간다.


* 지금 생각해 보니 한국어로 달라는 것이었나 보다. 당시 조선족은 학교에서 수업도 한국어로 하고, 거리 간판이나 메뉴판도 한국어 표기가 우선이었다고 한다. 2020년부터 중국 당국이 '민족 통합 교육'을 실시하면서 조선족 학교에서도 한국어로 수업을 하지 않고, 한국어 표기가 우선이었던 연변에서도 중국어를 우선으로 표기하는 법을 시행했다고 하니 앞으로는 이런 혼란이 줄어들 것 같다.




중국 비행은 비행시간은 짧지만 바쁘다. 특히 조선족들이 많이 타는 비행은 중국인 손님 10에 6~7명은 서류 쓰는 걸 도와드려야 한다. 이분들이 서류를 맞게 쓰든 말든 대충 모른 척 나눠주어도 공항에서 어떻게든 알아서 작성은 하겠지만, 혹시나 서류 미작성으로 입국장에서 문제가 생기게 되면 항공사가 페널티를 받는다. 그리고 한 사람 서류작성을 도와주는 게 뭐 얼마나 힘든 일이라고 외면할까. 예전에는 요청하시는 분들의 여권을 걷어 갤리에 가지고 와서 쓴 뒤에 다시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공문서는 본인 작성이 원칙이고 여권 분실이나 훼손 등 최악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요즘은 시간은 더 걸리더라도 직접 쓰도록 도와드리고 있다. 정말 못쓰신다는 분들은 대신 써주지만 내가 지금 무엇을 쓰고 있는지 일일이 알려주고 서명은 직접 하게끔 한다.

 

중국 손님들은 목소리도 크다. 성조가 있는 중국어 특성상 소리가 더 크기도 하지만. 누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승무원인지 알게 되면 복도 반대쪽에서도 큰소리로 부르기도 하신다. 기내 안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부끄러운 내성적인 나에겐 못 들은 척하고 싶은 순간이기도 하다. 절대 못 들었을 수 없는 소리지만.


중국 손님들이 많이 탑승한 비행은 식사서비스 때도 바쁘다. 그분들은 식사도 많이 드시고 음료도 많이 드시고 물도 많이 드신다. 드리는 즉시 원샷하고 더 달라고 하는 분도 많다. 사이드오더가 너무 많아 받은 요청을 까먹기도 하고 자잘하게 정신없다. 도떼기시장 같달까?  


그래도 크루들끼리 하는 말이 중국인들은 시끄럽고 정신없어도 식사만 잘 드리면 웬만한 실수도 웃고 넘어간다며 대륙의 베포가 느껴진다나? 단, 중국인이라고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불같이 돌변할 수도 있으니 각자의 국가를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회사에는 중국인 승무원도 있지만, 중국인 승무원이 부족한 날엔 한국인 승무원 중에 중국어방송 자격이 있는 승무원을 중국비행에 배정한다. 보통 중국어 방송 자격이 없다면 한 달에 중국비행은 2~3번 정도 가게 된다. 하지만 나는 중국어방송 자격이 있었고, 바쁜 성수기에는 한 달에 10번까지 중국어 방송 비행을 가기도 했다. 그 달은 정말 너무 바빴고 힘들었고 서러웠다.


지금은 방송을 나누어하도록 배려해주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나 혼자 한국어와 영어방송을 하면서 중간에 중국어 방송까지 했다. 한국어와 영어방송을 한 사람이 하고 중간에 중국어 방송을 중국인 승무원이 커버해 줄때와 한국어 중국어 영어 방송을 혼자서 다 해야 할 때의 부담감은 천지차이다. 방송문도 쓸데없이 길었다. 요즘은 짧고 깔끔한 안내방송이 트렌드지만 예전에는 상냥하고 자세한 안내방송이 트렌드라 구구절절 말이 많았다. 한국어방송과 영어방송을 다 할 때쯤이면 하는 사람도 듣는 손님도 지친다. 그런데 중간에 중국어 방송까지 해야 했으니. 그리고 방송은 엄연히 비행 외 업무이기에 비행 서비스 흐름에 지장을 주지 않게 서비스를 하다가 중간중간에 타이밍에 맞게 필요한 방송들을 해야 한다.  


문제는 방송뿐만 아니었다. 내가 중국어방송을 하는 날엔 그날 항공기에 유일하게 중국어가 가능한 승무원인 날이 많다. 그럴 땐 내가 비즈니스클래스 담당 승무원이어도 이코노미클래스에 중국 손님과 일이 생기면 가서 통역을 하고 해결을 해야 하는 일들도 있다. 한참 비즈니스클래스에서 바쁠 땐 마음이 더 무겁다.

 

중국사람들은 웬만하면 '하오하오'하며 넘어가는데 문제가 생겨 내가 가게 되는 일은 컴플레인이거나 뭔가 심각한 오해가 있는 상황이 많다. 그날은 기내식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는 사전정보를 듣고 갔다. 다행히 기내식이 너무 적다고 밥을 더 달라고 하는 중국 아저씨의 귀여운(?) 컴플레인이었다. 손님의 말을 못 알아들은 후배가 손님이 덜 드신 기내식을 회수하려고 하자 손님이 버럭 하며 언성을 높였고 겁이난 후배가 기내식 문제로 보고를 한 것이었다. 앙뜨레를 하나 더 드리는 걸로 간단히 해결을 했지만, 내가 봐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은 기내식 양이 속상하다. 우리 회사 비행기 타고 배고프신 중국 손님들 많아지겠네.  


이런저런 해프닝을 여차저차 해결하고 비즈니스클래스에 돌아가면 그곳에도 나의 결원으로 더 바빠져 있다. 담당 클래스 업무를 두고 다른 클래스에 가는 건 내가 클래스 시니어일 때도 난감하지만, 클래스 주니어일 때는 엄청 눈치 보인다. 놀다가 온 게 아닌 걸 알아도 담당 클래스 서비스에 차질이 생기니 시니어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하랑 씨, 이제 오면 어떡해? 빨리 다음 코스 준비하세요."

방송 때문에 서비스 흐름이 끊겼을 때도 마찬가지다. 가끔은 들으란 듯이 날이 선 뒷담화를 하기도 한다.

"현지어 방송 자격을 따기 전에 비즈니스 서비스부터 스킬업을 했어야지."

이코노미클래스 근무 때부터 있었던 중국어방송 자격을 비즈니스클래스 근무를 하게 된다고 없애주는 것도 아닌데, 뭐 어쩌라고.


그럴 땐 직업도 같은 배를 탄 직장동료도 삶까지도 회의가 든다. 나는 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중국어 방송 자격까지 따서 이 고생을 할까?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별 수 없다. 그런 소리 듣기 싫으면 더 열심히 비행 준비하고 더 많이 아는 수밖에. 남보다 한 가지 더 하려고 하는 사람은 남보다 못하는 게 있어서는 안 된다.


단지 고과 점수만을 위해 현지어 방송문을 외워서 방송자격을 따는 승무원도 있지만, 내가 아는 동료가 그렇게 한다고 하면 말리고 싶다. 그 방송자격이 있게 되면 단지 방송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로 비행할 때 생기는 돌발상황의 대처와 해결이 내 통역에 달려있으니 신중히 생각하라고. 내가 그 자격으로 탑승하는 대신 그 비행에 현지인 승무원은 탑승하지 않는 것이니, 어느 정도 수준으로 현지인과 프리토킹이 되지 않는다면 다시 생각하라고.  





짧지만 긴 비행동안 온 비행기를 휘젓고 다녀 영혼까지 탈탈 털린 상태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뭐라고 터 놓을만한 큰 사건이나 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진상 손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블랙 선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나 혼자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든 비행. 기가 빨렸다는 게 이런 걸까?


'오늘은 엽떡 각이다. 집에 가면 엽떡이나 시켜 먹어야지.' 생각하며 하기인사를 하는데, 나와 대면을 했던 중국인 손님들이 두리번거리며 오다가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또 그 큰 목소리로 '쌍큐쌍큐'를 외친다. '시예셰에, 짜이찌엔' 내 목소리에 문 앞에까지 나가셨던 분도 뒤돌아보고 '싱쿨라~ 짜이찌엔!'하고 웃어주신다. 평상시와 별 다를 것 없는 하기 인사였지만 그들의 인사에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렇게 그날도 또 이름도 모르는 스쳐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순간이긴 하지만 이런 순간이 또 다음 비행을 갈 수 있는 힘이 된다.


유난히 힘들었던 그런 날도,
별 것 아닌 일로 또 괜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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