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와 J의 슬기로운 여행 계획
하나. 목적지를 정한다.
둘. 날짜, 이동 경로, 숙소를 정한다.
셋. 짐을 싼다. 준비 끝!
가족이 한 달 동안 어디를 가면 좋을까 생각을 하니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미국과 캐나다 자동차여행이었다. 마침 언니네 가족이 뉴욕에 살고 있으니 뉴욕을 베이스로 하고 미국 동부와 캐나다를 여행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뉴스에 보도되는 마약, 총기 사건사고가 자꾸 눈에 띄고, 왠지 무서운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그렇게 치면 전쟁 위험과 백두산 화산 폭발위험이 있는 한국에서는 어떻게 사냐고 하겠지만, 쫄보인 나는 한 번 걱정이 시작되니 점점 불안이 더 커져갔다. 결국 미국과 캐나다 여행은 나중에 언젠가 친구나 친척의 가족과 함께 두세 가족 정도 함께 움직일 수 있을 때 가는 게 낫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우리는 목적지를 반대방향으로 옮겼다. 유럽으로.
유럽 어디를 가는 게 좋을까 생각을 하니 몇 군데가 떠오른다. 예전에 남편과 독일/오스트리아를 여행하다 그림 같은 풍경에 반한 곳이 있었다. 둘째 아이가 있기 전이었는데 '아이 좀 더 크면 여긴 꼭 데리고 다시 오자', '둘째도 함께면 더 좋겠고'라고 약속했던 오스트리아의 장크트길겐 마을. 아이들이 수영하고 있는 반짝거리는 호수와 호숫가에 누워 햇살을 즐기는 어른들의 여유로운 모습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그래, 거기에 지금쯤 아이들과 가면 딱 좋겠다.
마침 파리의 디즈니랜드가 30주년 이벤트 중이니 파리도 넣어야 했다. 사실 처음 미국으로 가면 어디 어디에 가볼지 상의했을 때 언니가 '근데 뉴욕에서 올랜도 디즈니 가는 것보다 파리 디즈니랜드를 가는 게 더 싸! 그냥 다 같이 파리 디즈니에서 만나는 게 어때?'라고 했는데, 결국 말한 대로 되겠다. 언니네 가족도 우리의 여행일정에 맞추어서 파리 디즈니에 휴가를 오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자연을 좋아하는 아이들과 못 가봐서 가고 싶다는 남편을 위해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도 넣고, 내가 좋아하는 비정상회담의 알베르토 씨가 꼭 가보라고 하는 돌로미티도 한 번 가볼까?
여기까지가 MBTI P인 나의 밑도 끝도 없는 여행 계획이고, 세부 날짜와 경로는 MBTI J인 남편 몫이다.
사실 유럽 여행의 시작이나 끝에 파리 디즈니를 넣기로 했고, 파워 J인 언니에게 그 일정을 알려줘야 하기 때문에 세부 경로보다 비행기 IN과 OUT을 언제 어디에서 할 것인가를 먼저 정해야 했다. 유럽으로 가는 항공권을 전 직장의 FOC 항공권으로 쓸 수도 있었지만, 온 가족이 FOC를 써서 유럽을 가는 것은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FOC 항공권은 저렴하지만 항공기 좌석 여유가 있을 때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명이 움직일 때는 괜찮지만 온 가족이 같이 움직여야 할 때는 4명 좌석의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에 조금 리스크가 있다. 그날 거의 만석이라 좌석이 부족해서 다 같이 못 타서 누군가는 따로 움직여야 하는 일도 심심찮게 봐왔기 때문에.
그래서 코로나로 심폐소생되었으나 어차피 곧 소멸예정인 항공사 마일리지를 쓰기로 했다. 마일리지로 항공권을 예매하는 것은 인기노선은 탑승일 1년 전 좌석이 오픈되자마자 이미 예약이 다 차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유럽의 메인도시로 오가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의 항공편 중 예약가능한 날짜를 다 찍어보며 열심히 찾아보았다. 그렇게 운 좋게 4 좌석 이상 남아 있던 항공편을 찾아 일정에 끼워 맞추면서 겨우 우리의 여행 기간과 항공노선이 정해졌다. 나갈 때는 대한항공을 타고 인천에서 파리로 나가고, 들어올 때는 아시아나를 타고 로마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인아웃 항공편만 예약이 된 채로 다른 여행계획은 진전이 없이 또 시간은 흘렀다. 유럽 여행뿐 아니라 제주도 이사도 알아봐야 했고, 우리 집 보릿고개라 할 수 있는 가족행사기간도 있었기에 서울과 제주, 경주, 대구를 오가며 정신없이 바쁘게 6개월이 지나갔다. 그리고 여행 가기 3개월 전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우리는 다시 여행 이동 경로와 숙소, 렌터카를 3일 밤낮으로 알아보았다.
렌터카 예약을 하면서도 여행 경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었다. 처음에는 파리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프랑크푸르트로 올라갔다가 그곳에서 차를 렌트하고 내려오기로 했다가, 갑자기 파리에서 베네치아로 넘어가서 렌트를 하는 것으로 바뀌기도 했고, 그러면서 원래 가려고 했던 도시가 빠지기도 계획에 없었던 도시가 추가되기도 했다.
숙소를 찾아보면서도 하루가 다르게 눈에 띄게 올라가는 가격에 조금 더 일찍 서둘렀으면 더 저렴했을 텐데 왜 빨리 준비하지 않았나 후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를 탓할까? 시간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제대로 알아보지 않는 P인 나는 다시 시간을 되돌려도 그러지 못할 것임을 안다. 그리고 미리 정해 놓았어도 또 시간이 있으면 다른 옵션을 찾아보며 비교하며 스트레스를 받을 J인 남편에게도 3개월 전쯤 벼락치기하는 것이 딱 맞았다. 생각해 보면 그래도 여태 우리가 갔던 여행 중에서 이번이 가장 미리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이기도 하다.
계획하면서 돌발상황도 있었다. 여행기간 동안 첫째는 학교에 '교외체험학습'을 간다고 신청하려고 했는데, 작년(22년)까지는 연속 한 달까지도 신청이 가능했던 교외 체험학습이 코로나가 잠잠해지면서 올해(23년)부터 연속 열흘까지로 줄어든 것이다. 뭐 2주는 교외체험학습으로 처리하고 2주는 결석으로 처리한다고 해도 별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괜히 내 속에 사는 고리타분한 FM 쫄보 소심이가 '혹시 누가 엄마아빠가 놀러 가고 싶어서 애 학교도 안 보내고 간다고 하면 어쩌지.'라고 하고 있었다.
찝찝해하던 찰나 '전국이 다 똑같이 열흘로 줄어들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제주도로 이사를 갔을 때 전학 가게 될 학교들을 검색해 보았다. 당시엔 이사 갈 지역만 정해놓은 상황이라 전학 갈 수 있는 학교 후보가 두 군데 있었는데, 다행히 두 곳 모두 아직 연속 한 달까지 신청 가능한 것으로 보였고 전학 후 바로 신청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결국 유럽여행을 다녀와서 제주도로 이사하고 전학수속을 하려고 했던 계획은 먼저 제주도로 이사 후 유럽여행을 가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덕분에 제주도로 이사 가는 것이 한 달 빨라지면서 집을 알아보는 일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돌이켜보니 이사를 한 뒤 여행을 다녀온 게 옳았던 것 같다. 이사만으로도 녹초가 될 텐데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로 이사를 했다면 둘 다 앓아누웠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여행 가기 두 달 전쯤 제주도에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해 계약을 했고, 여행 가기 한 달 전쯤 남편도 퇴사를 했다. 그리고 여행 가기 열흘 전쯤 제주도로 이사 왔고 생활하기 편하게 이삿짐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다시 여행 가방을 챙겼다.
여행 준비물을 챙기고 짐을 싸는 것은 또 내 특기다. 남편의 짐부터 아이들의 짐까지 너무 무겁지 않게, 하지만 필요한 것은 다 챙겨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한 달간의 여행동안 그 빛을 발한다. 15년 동안 비행을 하며 이골이 난 것은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니라 캐리어 패킹인 듯하다.
2023년 5월 28일 ~ 2023년 6월 26일
그해 늦봄 혹은 초여름, 유럽의 기록을 남겨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