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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랑 Feb 01. 2024

공항으로 가는 길

"손님, 음료 하시겠습니까?"

"토마토 주스 한 잔과 오렌지 주스 한 잔 주세요."

"어떤 음료가 어린이 손님 음료인가요?"

"둘 다 얘가 먹을 건데요.."

항공기 건너편에 앉아 있던 남편과 승무원의 대화다. 내가 승무원이어서인지, 아니면 날 만나기 전부터 그렇게 살았던 남편의 성격인지 모르겠지만, 남편은 '이륙하면 어디든 한 시간 안에 도착하는 국내선에서, 좌석도 좁고 화장실에 가기도 불편한데 굳이 기내에서 음료를 마셔야 하나?'라는 주의다.

그리고 그런 남편의 옆에는 비행기 탈 때부터 토마토 주스를 마실까 오렌지 주스를 마실까 고민을 하던 첫째아이가 '아빠 음료 안 마시니 두 잔 다 네가 마셔'라는 말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두 눈을 반짝이며 기대하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주는 음료 한 잔 아니 두 잔에 이렇게 행복해하는 첫째아이를 보니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제주도로 이사 온 지 일주일 만에 다시 서울로 오게 되었다. 아직도 감당되는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한 달 동안 가족 유럽여행을 가기 위해서.


서울에 살았을 때는 내가 항공사 직원이었던 덕분에 해외여행을 가볍게 다닐 수 있었다. 여행이 가고 싶으면 출발할 날 그리고 돌아올 날 항공편 좌석의 여유를 확인하고 여유가 있으면 '가자!'하고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가면 되었다. 만석이라 FOC 티켓으로 갈 수 없으면 아쉽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인천공항에 가는 일은 고되지 않았다. 물론 그때는 아이가 하나였을 때이고 친정에서 아이를 돌봐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많이 다니던 때는 남편과 둘이 1년에 5~6번 정도 외국에 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제주도로 이사 오니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부담이 생겼다. 바로 해외로 여행을 가려면 일단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간 뒤 다시 인천공항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항공사 직원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서울에 살았다는 것, 공항철도로 인천공항에 갈 수 있는 지역에 살았다는 것도 해외여행의 부담을 덜어주었을 줄이야!

단지 비행기를 한 번 더 타는 차이긴 하지만, 한번 비행기를 타고 내리면 왜 그리 피곤할까? 예전보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게다가 공항이 다르니 비행 편을 연결 편으로 맞추기도 힘들고, 국내선은 국제선과 수하물 규정이 달라 한 달 여행의 짐을 챙기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국제선 생각하고 짐을 챙기면 국내선 무게는 금방 초과되어 버렸다.

결국 우리는 가지고 갈 짐은 많고, 장기 여행인데 초반부터 체력을 소진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예정된 출국일 이틀 전에 서울로 올라가서 조금 쉬면서 여행 짐을 다시 싸기로 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미리 예약해 둔 서울식물원에 있는 근처 코트야드 호텔로 가달라고 했는데, 기사님이 어디서 왔냐고 물으신다. 원래 이 동네 주민이었는데, 이방인이 되어 돌아오니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뭇거리다 ‘아, 제주에서 왔어요.’라고 대답을 했는데 아이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어! 롯데몰이다.”

“엄마, 여기로 가면 우리 집이잖아!”

“우리 서울 식물원 가는 거야?”

“엄마 지난주에 어린이집에서 식물원 갔었어”


‘택시 기사님이 뭐라고 생각하실까? 그냥 여기 산다고 하기엔 많은 짐을 들고 호텔로 가자고 하는 게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제주에서 왔다고 했는데, 제주 여행 다녀왔다고 이해하실까? 그럼 왜 집으로 안 가고 호텔로 가냐고 의아해하실 거 아냐..’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것으로 오해받은 상황에 변명을 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택시는 호텔 앞에 도착했다. 택시에 내리고 나서야 적당한 대답이 생각났다.

‘아! 그냥 여기 살았었다고 할걸.’

그냥 편하게 얘기하면 되는데 늘 두세 번 더 생각해 보고 말을 하느라 대화가 엉망이 되어버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럴 땐 차라리 말에 무게가 실리지 않는 수다쟁이가 되고 싶다.

‘기사님, 저희가 사실 지난주까지 여기 살다가 제주 이사 갔거든요? 그런데 해외여행 가려고 다시 여기 올라왔어요.’

근데 이러면 왜 인천공항으로 안 가고 여기 호텔로 가냐고 의아해하시겠지? 이미 이것도 너무 TMI 같은데.. 그냥, ‘지난주까지 여기 살다가 제주로 이사 갔는데, 일이 있어 잠깐 다시 올라왔어요.’ 이 정도가 딱 좋겠다.


사실 택시 기사님은 전혀 아무 생각 없이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을 텐데, 또 나 혼자 난리다. 대화의 기술이 부족한 나는 이런 상황이 지나고 나서야 그 상황에서의 타인과의 적절한 대화 범위가 정리가 된다. 그래서 내가 말이 아니라 글을 좋아하나 보다.



서울의 호텔에서 2박을 하며, 남편도 이발을 하고 큰아이도 머리끝을 정리했다. 둘째 아이도 하고 싶었으나 미용실 가는 것을 너무 싫어해서 하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둘째 아이는 머리숱이 많지 않아서 5살인 지금까지도 내가 집에서 끝만 정리해주고 있다.

서울 살 때 자주 왔었던 김포공항 롯데몰로 가서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여행 짐들을 쇼핑했다. 한 해가 다르게 크는 첫째 아이는 새 수영복이 필요했고, 여름엔 크록스만 신고 다니던 남편을 위해 샌들을 샀다. 그리고 온 가족이 한 두벌씩 건조가 빠른 티셔츠와 반바지를 더 산 덕분에 필요 없어진 신발과 옷은 제주도 집으로 택배로 보냈다. 참, 안 그래도 머리 손질을 잘 못하는데 미용실 잘못 가서 망해버린 나의 머리(이 이야기만 하려 해도 정말 글 하나가 뚝딱이다)를 위해 올봄부터 유행하던 왕집게핀도 충동적으로 샀는데, 안 샀으면 어쩔 뻔? 여행 내내 정말 잘하고 다녔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이틀의 시간이 끝나고 아침부터 비가 내리던 5월의 마지막 일요일, 우리는 드디어 호텔을 나와 공항 철도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1. 제주공항에서 출발, 헬로 아니고 굿바이 2. 호텔에서 아침, 둘째의 산발 된 머리 3. 공항철도를 기다리며



2023년 5월 28일 ~ 2023년 6월 26일

그해 늦봄 혹은 초여름, 유럽의 기록을 남겨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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