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세상의 소리로부터 단절되어 살아간다.
세상의 ‘노이즈’로부터 ‘캔슬링’되어서 말이다.
지하철을 타거나 길을 걸어갈 때면, 각자 개인의 물방울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모두들 양쪽 귀에 조그마한 블루투스 이어폰을 꼈을 뿐인데.
이어폰을 끼고, 세상을 ‘노이즈 캔슬링’ 해버리면, 정말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성과 나, 이렇게 둘만 존재하는 듯 느껴진다.
시끄럽고 잡다한 소리들은 모두 차단되고 내가 듣고 싶은 소리만 가득한 세상 속에서 걸어가는 건 꽤나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가끔, 차단되고 싶을 때 우리는 이어폰을 끼기도 한다.
여러 사람이 함께 작업할 때, 혹은 택시에서 혼자 조용히 가고 싶을 때 등의 상황에서
‘아무도 나에게 말 걸지 않았으면 좋겠고 혼자 조용하게 제 할 일을 하고 싶어요’라는 긴 말을 ‘이어폰을 끼는 행위’로 표현하곤 한다. (요즘 SNL의 ‘에어팟을 껴야 능률이 올라가는 편입니다 ^^’의 맑눈광이 이슈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도 이 신기술의 얼리어답터로서 몇 년간 ‘에어팟’을 사용해왔다.
계속해서 발전하는 노이즈 캔슬링 기술은 정말이지 세상의 온갖 소음을 다 막아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시끄러운 지하철, 거리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되고 좋아하는 노래만 들으면 걸어갈 때면, 21세기에 태어난 것에 감사하게 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문득 어느날 바라본 지하철 안 풍경은 너무 차가웠다.
누군가 옆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도 모두 이어폰을 낀 채 쳐다보지 않았다. 어느 날은 낯선 길을 가다가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는데, 전방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 이어폰을 낀 채로 ‘말걸지 마시오’를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아 선뜻 다가갈 수가 없었다.
노이즈캔슬링의 삶을 산 지 몇 년 사이, 우리는 그것이 없을 때의 삶을 완전히 잊은 듯하다.
생각보다 많은 것이 변화했다.
먼저, 노이즈캔슬링은 생각보다 ‘노이즈가 아닌 것들’도 캔슬링해버린다.
길 가다가 들리는 예쁜 소리들부터 누군가 온힘을 다해 외치는 소리들까지.
세상에 대한 관심은 ‘듣기’로부터 시작한다. 들어야 알 수 있다. 들어야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외침은 있지만 듣는 사람은 없는 세상은 너무 슬프지 않은가. 그런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는게 아닐까.
잠시, 노이즈 캔슬링을 빼고 줄이어폰을 써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세상의 필요한 노이즈들까지도 차단해버린 채 살아왔는지.
또, 주변의 것들을 살펴볼 마음의 공간이 생긴다. 세상의 모든 소리로부터 차단되고 ‘나의 것’에만 집중된 상황에서, 주변에 있는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기란 쉽지 않다.
나의 것이 아닌 주변의 것들도 내 안에 함께 공존하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주변에 시선을 두게 된다.
버스에서 줄이어폰을 끼고 앉아있으면, 주변에 많은 소리들이 섞인다. 옆사람의 말소리, 바깥에서 나오는 노래소리, 빵빵거리는 소리, 라디오 소리.. 우리는 그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서 눈을 돌리게 된다.
물론 줄이어폰을 쓰다보면, 노래 소리와 영상 소리가 잘 안 들릴 때도 있다. 엉킨 줄을 푸느라 고생할 때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각자의 버블 안에서 나만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바깥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는 것.
아무도 듣지 못할뻔한 예쁘고 작은 소리를 들은 유일한 사람이 되는 것.
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목 터져라 부르는 그 소리를 못들은 척 하지 않는 것.
차가운 버블을 깨고 여기저기 눈길을 돌려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