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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셔스 Jan 17. 2024

샌프란시스코에는 없고, 보스턴에는 있는 것

보스턴의 우중충한 겨울

미국 보스턴의 겨울은 길다. 핼러윈이 지나간 11월부터는 해가 떠있는 시간이 급격히 짧아진다. 12월 말경인 동지쯤에 이르면 해는 오후 4시에 진다. 구름도 많이끼고 눈도 비도 자주 온다. 해가 떠있는 동안에도 태양은 뭔가 '비실비실'하다. 아무리 해가 쨍해도 눈이 부시지가 않다.  퇴근할 무렵이 되면, 이미 한밤중 마냥 깜깜하다. 이 긴 겨울은 3-4월 경이되어서야 조금씩 나아진다.


보스턴은 외국인 내국인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도시이다. 하버드 대학교, MIT 대학교를 구경하러 오고, 리틀 이탈리아에서 파스타를 먹고,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아름다운 건물들과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을 구경하러 온다. 나 역시 한국에 있을 때, 보스턴에 참 오고 싶었다. 어느새 보스턴에서 살게 된 지 2년이 넘어가고 나는 보스턴에서 세 번째 겨울을 맞았다.


첫 번째 겨울은 긴지 안 긴지도 모르고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지나갔고, 두 번째 겨울에 처음으로 윈터 블루(Winter Blue)를 맞았다. 세 번째 맞닥뜨린 이번 겨울에, 나는 심각한 윈터블루를 겪고 있었다. 윈터 블루는, 무기력하고, 수면장애를 겪고, 슬픈 감정이 드는 것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을 나열한 말이다.


게다가 나는 일 중독자다. 낯선 미국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니 나도 모르게 일 중독자가 되어있었다. 일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샤워를 하다가도, 자려고 누워있다가도, 일을 생각한다. 주말에도 일을 한다. 밤에도 일을 한다. 눈만 뜨면 컴퓨터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컴퓨터 앞에 무의식적으로 눈만 뜨면 앉아서, 타자를 두드리면서도, 나는 뭔가 가라앉고, 우울하고, 슬픈 감정이 들었다. '울고 싶다'라는 맘이 저절로 들었다. 스스로가 이해가 안 갔다.  


내가 왜 이럴까? 남들이 다 오고 싶어 하는 멋진 도시에서, 좋은 직업을 갖고, 훌륭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데? 일이 많긴 하지만, 육체적으로 힘든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갈등이 있거나 나를 무시하고 구박하는 사람도 없는데?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한국에서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슬픈 감정이 모두 다 날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이 그리웠다. 책상에 앉아 달력을 보니, 월요일이 휴일인 연휴였다. 나는 홀린 듯 항공사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내가 그렇게 가고 싶던, 금문교가 있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항공권을 끊었다. 싸구려 모텔도 예약했다. 출발은 이틀 뒤였다. 출발 당일 새벽에 일어나, 간단한 옷가지만 배낭하나에 넣고 나는 홀로 보스턴 로건 공항으로 향했다.


보스턴과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을 4800km를 가로질러서 동서 반대쪽에 위치해 있다. 보스턴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꼬박 6시간을 날아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리자마자 야자나무와 드디어 눈이 부신(!) 햇살이 나를 반겼다. 샌프란시스코의 1월의 날씨는 영상 10도를 상회하니 보스턴에 비하면 참으로 포근한 날씨다.


출처 빅버스 홈페이지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철저히 관광객이 되기로 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관광지를 차례대로 들리는 투어버스에 탑승했다. 빅버스라는 업체가 운영하는 빨간색 투어버스 2층에 썬글라스를 끼고 앉아, 샌프란시스코의 주요 관광지를 포함하여 온 도시를 한바퀴 돌았다.


다음 날엔 샌프란시스코의 주요 관광지를 도보로 돌아다녔다. 샌프란시스코를 관광하는 누구나 탄다는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는 1800년대 후반에 처음 만들어져 시내를 돌아다니는 데, 이름은 케이블카이지만 사실은 케이블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바닥에 레일이 깔려 있고 열차 자체의 동력으로 달린다.

케이블카를 타고 차이나타운에 갔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은 미국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이라고 한다. 깎아내린듯한 언덕에 위치한 차이나타운은 정말 컸고, 하나의 작은 중국이었다. 역시 누구나 들른다는 차이나타운 ‘골든게이트 포춘쿠키’ 집에서 5불을 내고 포춘 쿠키를 한 봉지 샀다. 옆집에서 만두도 사 먹었다.


포춘 쿠키를 먹으며, 역시 누구나 들른다는 구불구불한 롬바드 거리를 구경했다.

구불구불 거리는 길로 유명한 롬바드 거리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그려왔던 골든게이트의 해 지는 풍경을 보기 위해 기다렸다. ‘골든게이트 포스트 카드 포인트’라는 곳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정말 엽서에 있는 골든게이트의 풍경이 내 눈 앞에 펼쳐져있었다. 오후 5시 15분에 해가 지고 그 여명이 사라질 때까지 한 자리에서 골든게이트를 끝없이 바라보았다. 석양을 바라보며 깨달은 건 어느새 내 안에 있던 슬픔과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 단 이틀만에 나의 윈터블루는 사라졌다.

석양이 지는 금문교 (골든 게이트)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만병통치약이었을까? 사실 겨울의 샌프란시스코는 그렇게까지 매력적인 곳은 아니다. 비도 자주 오고, 햇살이 사실 엄청 따스하지도 않고, 바닷가는 겨울 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춥다. 금문교의 아름다운 석양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나는 내가 이곳에서 생활인이 아니기 이 순간이 특별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보스턴의 하버드 광장이 나에게는 별 느낌이 없는 것처럼, 아마도 이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도 매일매일 본다면 어느 순간 별 감흥이 없어질 것이다. 만약 내가 금문교 방문자 센터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금문교는 나의 일터 그 이상도 아니게 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는 내 일상이 없고, 보스턴에는 내 일상이 있다.  


여행이 특별한 이유는, 그곳에 내 일상이 없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는 맛있는 것에 돈을 아끼지도 않고, 일도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잘 놀까를 궁리하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또 한편으로는, 여행이 특별한 이유는 내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기 때문이기도 하다. 3일만에 나는 집이 그리워졌다. 이 여행에서 활력을 얻어 나는 다시 일상을 살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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