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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 빛 Sep 02. 2023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늘 보고 싶은 너에게

노화에 대하여

안녕 라일락?

 


언젠가 내가 너를 낳게 된다면 이름을 라일락이라고 지어보고 싶었다. 아주 흔할법한 꽃인데 또 그렇게 흔하지만은 않은 꽃. 자주 맡는 향도 아닌데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향, 감히 향수 몇 방울로는 다 담아내지 못하는 신비로운 향, 가느다란 잎들로 진하고 강한 향을 내뿜고 있는 라일락 꽃이 지닌 특징들이 좋아서, 너는 향기롭고 강한 사람이 되었으면 해서.



물론 너에게도 이름을 바꿀 자유는 충분히 존재한단다. 내가 미국에서 스스로 지은 영어 이름으로 불리기를 택했듯이 너도 얼마든지 네 마음에 드는 이름을 선택하기를 진심으로 존중할게.



이제부터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너의 아빠와 나 사이의 순간들을 적어보려 한다. 네가 대화가 통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말로 들려줄 수 도 있겠지만, 혹시나. 우리의 소중한 순간들을 그때가 되면 가물가물 잊어버릴까 봐. 그래서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서둘러 기록해 보려 한다.



아직 나는 엄마가 되어 본 적이 없기에 내 입으로 차마 "엄마가 말이야..."라고 쓰지는 못하겠고 그저 "나"라고 칭할게. 그리고 네가 딸인지 아들인지, 그 사이 어디쯤 성별을 정하지 않기를 원하는지도 확실치 않으니 그저 내가 지은 너의 이름을 잠정적으로 부를게 일락아.



오늘 나는 너의 아빠의 새치를 발견하고 무의식적으로 잡아당겼단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너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한테 종종 새치를 뽑아드리는 "효도"를 했었거든. 미관상 보기 흉하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가까운 사람의 새치를 보면 알려주고 뽑아 주는 것이 미(美)를 위한 당연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혀 있었던 것이지.



너의 아빠는 매우 언짢아하며 왜 새치를 제거하냐고 정색해서 나도 계면쩍은 김에 내가 왜 그랬는지 처음으로 곰곰이 생각해 봤어.



나이가 든 다는 것. 살아오면서 지어온 표정대로 피부에 주름이 생기고, 멜라닌 색소가 옅어지면서 새치가 생긴다는 것. 그렇게 한 인간의 노화가 진행된다는 것은 전혀 부끄럽거나 감춰야 할 사실이 아니더라.



그래. 물론 노화를 늦추려는 인간의 노력이 남에게 해가 되거나 나쁜 것은 아니지. 네가 자라서 외적인 부분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어른이 되겠다고 해도 그건 그저 관점의 차이일 뿐이니 너의 선택을 존중할게.



그런데 일락아. 억지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노화 또한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너의 아빠의 모습이 나는 왠지 멋져 보이더라.



라일락. 거울을 들여다보는 시간보다 너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질 때 너의 새치는 더 이상 흉한 것이 아니게 된단다. 나는 다소 늦게 깨달았지만 너는 조금 더 일찍 그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춘기 때 성장하는 나의 신체가 부끄러워 내 가슴을 압박하고 남편의 노화에 보탬이 되고자 새치를 잡아당겼던 나와는 달리 너는 너의 성장과 노화를 자연스럽고 자랑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우리의 새치를 보더라도 잡아당기지 않기로 약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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