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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it Feb 11. 2024

메카쿼츠 I

쿼츠크로노그래프(1) 아날로그 쿼츠 크로노그래프의 역사




1969년에 아날로그 쿼츠인 Seiko Astron이 발표되면서 쿼츠파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쿼츠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디지털시계가 본격화되면서부터였습니다.


1972년에는 Hamilton이 디지털 쿼츠시계인 Pulsar Time Computer를 출시했습니다. 


이 시계는 LED로 작동되었는데 움직이는 부품이 하나도 없는 완전 전자식이었습니다.


1975년까지 미국에서는 전자시계사업에 뛰어든 회사가 50여개나 되었습니다. 


당시 Business Week의 커버스토리는 “Digital Watches: Bringing Watchmaking Back to the U.S.”였습니다.


하지만 전자시계의 핵심 부품인 LED와 LCD는 무어의 법칙처럼 18개월마다 반값이 되면서 인건비가 비싼 미국의 시계산업은 급격하게 가격경쟁력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미국에서 전자시계회사가 거의 사라졌고 홍콩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로 생산거점이 옮겨갔습니다. 


1980년 한해에 홍콩은 1억2,600만개의 시계를 수출했으며 그 중 절반이 디지털 시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디지털 쿼츠시계의 가격과 이미지가 모두 저렴해지면서 아날로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맞이한 1983년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혼재된 해였습니다. 




Jean Claude Biver는 Blancpain을 인수하면서 기계식 시계의 부활을 선언했고, Nicolas Hayek는 최초의 Swatch를 아날로그 쿼츠로 출시했습니다. 






반면 Seiko는 텔레비전 시계를, Casio는 G-shock을 발표하면서 디지털 쿼츠는 첨단 기술과 미래적인 감성으로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모양새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 어디쯤에서 세계 최초의 아날로그 쿼츠 크로노그래프가 탄생했습니다. 


당시에는 크로노그래프를 사고자 하면 기계식과 LCD화면의 디지털 쿼츠밖에 없었는데 그 사이를 Seiko 7A28이 메꿨습니다. 


(7A28은 무브먼트의 명칭이고 이를 장착한 시계들은 7A28-****, SPR***, Speedmaster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냥 7A28로 부르겠습니다.)




7A28은 고급시계를 지향하면서 무브먼트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소재는 기계식 무브먼트처럼 금속으로 만들어졌고, 시간조정기능이 있으며, 유지관리를 위한 분해-수리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보석수 15개에 스태핑 모터도 4개나 장착하여 요즘의 쿼츠무브먼트(플라스틱, 보석 0개, 모터1개)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기계식으로 구현하려면 엄청난 고가인 1/20초 측정기능이나 스플릿 타이머기능도 넣었는데, 이는 기계식 크로노그래프와 모양은 같지만 성능은 훨씬 더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 같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1984년에는 7A28에 Day date기능을 추가한 7A38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는 가장 성공적인 기계식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인 Valjoux 7750과 기능상으로 같았고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7A28과 7A38은 쿼츠파동을 극복하고 이제 막 부활하려는 기계식 크로노그래프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시계 같았습니다.





7A시리즈는 100여가지의 레퍼런스, 40여개의 변형모델이 만들어졌는데 가격은 1986년 기준으로 7A28가 약 30,000~50,000엔, 7A38은 100,000엔까지였습니다. 


1985년에 있었던 플라자합의의 영향으로 1986년에 엔화가치가 두 배로 치솟은 영향도 있겠지만 이는 당시 오메가 스피드마스터보다도 비쌌다고 합니다.



7A28는 1985년에 007시리즈 ‘A View To A Kill’에 등장했고, 1986년에는 ‘Aliens’에도 등장했습니다. 


특히 Aliens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리플리 시계로도 불리우는 7a28-7000은 이탈리아의 자동차 디자이너 Giorgetto Giugiaro의 작품인데, 그는 백투더퓨터의 DMC-12와 우리나라의 포니를 디자인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1984년에는 영국 공군이 7A28-7120을 파일럿 워치로 채택합니다. 이 시계는 7A28 RAF Gen1로 불리면서 1990년까지 영국 전투기 조종사들과 함께했습니다.



이렇게 Seiko의 아날로그 쿼츠 크로노그래프가 승승장구하자 1987년에 스위스의 Frédéric Piguet, Jaeger-LeCoultre가 기계식 쿼츠, 즉 Meca Quartz를 내놓습니다.


메카쿼츠의 시간표시기능은 쿼츠 무브먼트로 제어되고 크로노그래프 기능은 기계식 모듈로 작동합니다. 


때문에 크로노그래프 초침이 기계식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리셋버튼을 누르면 크로노초침이 12시로 튕겨서 복귀하는 모양도 기계식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스위스의 메카쿼츠는 보석수가 25개에 달하고 기계식시계에 가까운 복잡한 구조를 가지는 등 일본의 것보다 훨씬 고급시계를 만들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Frédéric Piguet의 무브먼트는 Breitling, Omega, Hublot, Chopard, Daniel Roth, Robergé, Bulgari등에, Jaeger-LeCoultre의 Calibre 630, 631은 JLC와 IWC, Porsche Design등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90년대에 기계식 크로노그래프가 부활하고 그 오랜 역사와 감성을 바탕으로 하이앤드 포지션을 장악하면서 아날로그 쿼츠 크로노그래프는 점차 로우앤드 시장으로 밀려났습니다. 


Seiko의 7A시리즈는 90년까지 생산되다 이후 더 저렴한 7T로 대체되었습니다. 


JLC를 비롯한 스위츠의 메카쿼츠도 2000년에 들어서는 더 이상 생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Seiko VK63같이 30달러도 안되는 무브먼트가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패션시계나 오마주시계, 마이크로브랜드 등의 저렴한 크로노그래프를 만드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계들은 서브다이얼이 영구초침, 24시간계, 60분 카운터로 구성되어 실질적으로 크로노그래프 기능보다는 그 감성만 소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 합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고깃집에 많이 붙어있는 구절인데, 알고 보니 안도현 시인의 시였더군요.


지금은 싸구려 패션시계 취급을 받고 있지만, 한때 기계식 크로노그래프를 압도하고 시장을 주도했던 아날로그 쿼츠 크로노그래프를 보면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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