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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it Feb 11. 2024

메카쿼츠 V

아날로그 쿼츠 크로노그래프(5) 젠타와 세이코





1. 기추신고



Seiko 7A38-7020 (SAA009J) 쿼츠 크로노그래프입니다.


Seiko는 1984년에 프랑스에서 열린 UEFA 유럽 축구 선수권대회의 공식 타임키퍼였고, 이 모델이 심판들에게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시계의 오리지널 박스에는 이를 나타내는 배지도 같이 들어있습니다. 시리얼넘버로 확인해 보니 이 시계는 경기 개최 기간이었던 1984년 6월에 제작되었네요.




가장 큰 특징은 AP 로얄오크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입니다. 그래서 세이코 로얄오크로 불리기도 합니다.


다각형 베젤이나 케이스-스트랩이 일체화된 디자인만 보면 Gerald Genta오마주 같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흔치 않은 다이얼 색감이나 전반적인 디자인적인 완성도와 균형을 보면 혹시 Genta가 이 시계를 디자인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실제로 Genta는 70~80년대에 걸쳐 Seiko와 협업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시계를 과연 Genta가 디자인했는지에 대해 좀 찾아봤습니다.






2. Gerald Genta와 Seiko



Gerald Genta(1931~2011)는 스위스에서 보석 및 금세공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생계를 이어갔다 합니다. 


1954년(23세)부터 시계 디자인을 시작했다지만 그 부인의 인터뷰를 보면 차를 타고 라쇼드퐁 같은데 찾아가 장당 CHF10씩 받고 디자인을 파는 게 일이었다네요. 


Genta는 이 기간에 Omega Constellation(1962년)의 달걀모양 케이스를 디자인했는데 이는 C-line이라 불리며 60~70년대 시계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가 전에 리뷰했던 SNXS79의 범상치 않은 디자인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Genta의 영향이었네요. 





그러다 1968년(37세)에 Universal Genève를 위해 디자인한 Golden shadow가 국제 다이아몬드상을 수상하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Patek Philippe의 Golden Ellipse 디자인을 맡게 되었고, 1969년(38세)에는 디자인사무소인 Gerald Genta SA를 설립하게 됩니다.



1972년(41세)에 Audemars Piguet으로부터 의뢰받은 Royal Oak가 성공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76년(45세)에는 업계 최고의 브랜드인 Patek Philippe이 Nautilus를 발표하면서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었고요.




Genta가 유명해지면서 Seiko와 일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1969년 쿼츠파동 이후 스위스 시계들은 무너지고 있었으며 1970년대의 Seiko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시계브랜드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쇼쿠닌(장인)을 조명하고 존중하는 일본문화도 한몫을 했던 것 같습니다. 


1972년에 Royal Oak가 등장하자마자 일본의 시계잡지와 컬렉터들은 열광을 했습니다. 


이들은 디자이너를 밝혀내는 데 혈안이 되었고, 결국 한 컬렉터에 의해 통상 디자이너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관행을 깨고 Genta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IWC나 Patek Philippe도 Genta가 디자인한 걸 인정했다고 합니다.


Genta는 Hamilton, Bulova, Timex, Van Cleef & Arpels, Chaumet, Rolex, Omega, Bulgari 등 수많은 브랜드들과 협업했는데 그중에서도 Seiko는 가장 큰 고객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일본을 직접 방문하여 디자인을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Seiko 공장을 방문했을 때 사장과 5명의 디자이너가 최신 작품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그는 작품을 보더니 통역사에게 “이건 롤렉스 카피, 저건 론진 카피, 이건 오메가 카피라고 전달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이에 통역사는 당황하며 차마 통역을 못하겠다고 했답니다. 


그러자 Genta는 CEO에게 직접 말을 걸어 “이건 짝퉁입니다. 디자이너들에게 스위스시계 카탈로그를 버리고 주변의 자연을 살펴보라고 요청하세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Seiko와의 협업은 73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공식적으로 Genta가 발간한 작품집을 통해 알려진 것은 1979년 Credor “Locomotive”(KEH018)입니다.




이후에도 1980년대까지 Genta는 Seiko와 협업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Seiko 프로젝트의 대가만으로도 80여 명이 근무하던 Gerald Genta SA의 신사옥을 지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일의 규모가 꽤 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시계를 디자인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디자이너가 드러나지 않는 업계 문화, 시계디자인이 제작사로 귀속되는 저작권 문제 등도 원인이었지만 스위스 시계산업을 망가뜨린 Seiko에 협력한 것만으로도 스위스에서는 배신자 취급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Genta가 Credor디자인을 했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도 스위스 업계의 반발이 심했다고 하는데, 이런 분위기는 Genta가 1984년에 디즈니캐릭터 시계를 스위스 무역박람회 Salon Montres et Bijoux에 출품했다가 쫓겨난 사건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추정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전에 Timex S1 편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1990년(59세)부터 Gerald Genta SA는 자체 브랜드만으로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정말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문을 받아 매년 신제품 200~300개에 모델당 10~20개씩 연간 2천여 개의 시계를 제작했지만 회사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확실히 그는 예술가였지 경영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2000년(69세)에 Bulgari가 그의 이름을 딴 회사, 상표, 디자인을 모두 인수하면서 Gerald Genta시계는 불가리 시계 중 하나의 라인업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 Genta는 8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3. 7A38-7020은 젠타가 디자인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명확한 증거는 없고 정황만 있을 뿐입니다.


7A38-7020이 만들어진 1984년은 일본경제가 미국을 뛰어넘을 정도로 잘 나가던 시절이었고, Seiko도 업계에서 그만큼 잘 나가고 있었으며, 그래서 세계 최고인 Genta에게 디자인을 의뢰할만한 여건이 되었습니다.



1984년 카탈로그를 보면 Genta 스타일의 시계들로 도배가 되어있는데, 심지어 PEQ990은 Genta가 IWC에 제안했다 미실현된 디자인을 닮아있을 정도로 Genta의 영향력이 컸던 시기로 보입니다.




그리고 Royal Oak보다 10년 앞서 크로노그래프를 내놨는 점. (Royal Oak는 1993년이 되어서야 크로노그래프가 등장했는데 파격적인 비율로 Genta한테 욕을 먹음) 


즉, 다른 디자이너가 Royal Oak를 오마주해서 만들었다면 Genta스타일을 응용-발전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텐데 원본의 한계를 깨고 완성도가 높은 디자인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Genta가 직접 디자인했을 거라 추정되는 부분입니다.



또한, Seiko는 1973년부터 Genta에 디자인을 위탁했는데, 이 기간 중 만들어진 Grand Quartz QNK020(1975년)라든가 Genta디자인이라고 확실히 알려진 Credor Locomotive(1979년)의 디자인적 특징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고 이는 다른 시계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도 Genta작품일 거라 의심케 하는 부분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디자인은 1984년에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7A38이라는 복잡한 기능과 수많은 요철을 가진 화려한 디자인을 볼 때 경제성은 확실히 떨어져 보입니다.


아마도 UEFA 유럽 축구 선수권대회를 기회로 시계의 본고장인 유럽에 뭔가를 보여주고자 전략적으로 만들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4. 사용기



7A38은 세계 최초의 아날로그 쿼츠 크로노그래프에 데이데이트 기능을 얹은 무브먼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7A38-706a에서 리뷰한 내용이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브레이슬릿은 제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관계로 가죽줄로 바꿨습니다. 


결합부는 10mm에 전체 폭은 24mm인 특이한 형태라 가죽공방에 맡겼습니다. 


조금만 안 맞아도 틈이 벌어져 엉성해 보였을 텐데 다행히 잘 맞게 나왔네요. 아쉬운 점은 러버밴드도 있으면 여름에 차기 좋을 텐데 마땅한 판매처를 찾기 힘드네요.



오래 쓰고 싶어서 오버홀도 했습니다. 


자주 가는 워크숍의 사장님은 지금까지 해본 쿼츠 중 가장 복잡하고 웬만한 기계식 크로노그래프보다 복잡해서 고생했다고 하시네요. 정말 작정하고 만든 무브먼트처럼 잘 만들었다고. 


오래된 만큼 전반적으로 얼룩과 배터리 누액흔적이 좀 있었는데 오버홀 후 말끔히 제거되고 저항값도 상당히 개선되었습니다. 



38mm 크기에 케이스-스트랩 일체형 시계인데도 불구하고 67.5g으로 가볍고 제대로 된 크로노그래프 기능에 날짜와 요일 기능, 여기에 Genta를 연상시키는 완성도 높은 디자인까지. 


여러모로 제 조건에 잘 맞는 시계인데 이젠 부품을 구하기가 어려워 고장이 안 나기만 바랄 뿐입니다. 


이미 40여 년을 지나왔지만 잘 관리해서 오래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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