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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연 Sep 16. 2023

할머니 싫어요

예순셋 할머니의 콩고물 수다

할머닌 싫어요 난 우리 엄마만 좋아요 우리 언니 하고...

감기 뒤끝에 몸이 괴로우니 징징대며 지 엄마 치마꼬리를 하도 잡고 늘어지기에 딸이 얼마나 힘들까 내 새끼 걱정되어 몇 마디 나무랐더니 단박에 고 쪼그맣고 예쁜 작은 손녀 입에서 야멸찬 소리가 톡 튀어나왔다.


몇 년 전 큰 손녀에게도 똑같은 말을 들었었다.

할머니 미워요. 제 우리 집에 오지 마세요.

버르장머리 없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인심 사나운 할머니에게 세 살배기  손녀 홧김에 철딱서니 없이 하는 소리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나 싫다는 소리가 듣기 좋을 리 없다


나이가 손녀보다 스무 배도 훨씬 넘게 많은 할머니는 세 돌도 채 안된 손녀에게 똑같이 되갚아 말한다.

나도 너 밉다 뭐. 나는 너 좋은 줄 아니?

그리고 부러 한참 동안 눈길도 주지 않고 관심 없는 척 딴청을 한다. 손녀가 내 옆으로 다가와 눈치 살살 보며 뭐라 뭐라 말 붙일 딱 그때까지...,


나 젊었을 때는 미팅이라 불리는 젊은이들 만남이 한참 유행이었다 경양식집이나 다방에 주선자가 모은 남녀 여남은 명이 쭈르륵 마주 앉아 제비를 뽑거나 상대 소지품을 골라 짝을 정하고 그럭저럭 마음이 통하면 둘이 슬쩍 빠져나가 근처 고궁이나 또 다른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평소에는 비싸 시킬 엄두도 못 내는 생크림에 계핏가루 솔솔 뿌려진 비엔나커피도 시키고 서로 취미가 뭐냐 집이 어디냐 시시콜콜 한걸 물어보고 답하며 과연 다음번에 한두 번 더 만나볼 것인지 아니면 오늘로 끝장내는 게 을지 찬찬히 재 보고는 하였다.


미모가 남보다 빼어나길 하나 마음품이 넉넉하길 하나 혀 짧은 소리로 애교 부릴 줄을 아나... 사실 나는 그 시절 가진 밑천이 너무 없었다.

딱 하나 가진 거라곤 말라비틀어진 자존심뿐이어서... 아니 그걸  자존심이라 해도 되는지 어쩐 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누군가를 만나자마자 저는요 부모님이 두분 다 일찍 돌아가셔 안계시구요  언니 하나에 동생이 셋인데 우리끼리 살아요.

상대가 궁금해하든 말든 묻지도 않은 말을 급하게 쏟아내며 속으로 내 처지는 이러하니 그래도 관심 있으면 한번 덤벼 보시든지... 공연히 뻗대는 마음이 먹어졌었다.


상대가 썩 마음에 들어도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았고 좋아 안달 나는 마음이 생겨나도  별 관심 없는 척하였다. 혹여 상대가 시들한 눈치라도 보일라 치면 나는 너 별로다 선수 치며 도망칠 궁리부터 하였다.


이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모든 것들이 상대에게 너 싫다 소리 들을까 두려워 상처받기 싫어 한 구차한 행동이었겠으나 난 지금까지 줄곧 그것이 변변히 내세울 것 하나 없던 젊은 시절의 나에게 꽤 쓸만한 무기였다 생각하며 살았다.

누군가에게는 솔직한 여자로 보였을 것이고 또 아주 가끔 그 누군가에게는 당당하여 멋져 보였을지도 모른다. 종당에 싫다 그만 헤어지자 하여도 바짓가랑이 붙잡힐 것 같지는 않으니 성가실 일은 없겠네 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 여간해서 잘 바뀌지 않는지라 다 늙어  할머니 되어 버린 지금까지 나는 그 천성을 버리지 못하여 손주들에게 마저 밀고 당기는  그 짓을 하고 있다.

그 옛날 어쩌다 오다가다 우연히 만나 오늘 하루 보고 그만 일지도 모르는 미팅에서 만난 짝도 아니고 천륜으로 맺어진 손주들이니 쉬이 헤어지거나 내처질 사이도 아니건만 나는 오늘도 마냥 푸근한 보통의 할머니는 되지 못한다.


내 다음 생에는...

좋아하는 상대가 생기면 요즘 한참 인기 있는 젊은 남녀  짝 맞추는 프로그램 나오는 젊은이들처럼 나 너 좋아한다 당당하게 고백도 하고 콧잔등 찡긋거리며 한껏 귀여워 보이게 웃기도 하고  말끝마다 그랬어용 저랬어용 애교스럽게 이야기해 봐야지.

다른 사람이 옆에서 하는 걸 보고만 있어도 속이 간질 질 하여지는 그 짓을  많이 많이 연습두었다가..

 내 기필코 다음 생에는...,

난 할머니 싫어요 하면 난 너 너무 좋은데? 솔직하게 말하고

우리 집에 오지 마세요 하면 네가 아무리 오지 말라 하여도 나는 너 보고 싶어 자꾸자꾸 올 거다.

나긋나긋 곱게 이야기하는 할머니가 될 거다.

꼭 한번 그렇게 살아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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