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뮌헨 교환학생에서의 첫날 이야기
굳이?
해외에 가 본 경험은 초등학교 때 1주일 동안 간 유럽 패키지여행이 다인 내가 뮌헨으로 교환학생을 가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굳이”라는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나는 참 “굳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겨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나는 늘 “굳이?”를 나 자신에게 말하며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하곤 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나를 현실의 테두리 안에 가둬 두는 것 같았다. 그렇게 KAIST에 입학한 지도 어느덧 2년이 되어갈 때쯤, 나의 머릿속은 군대와 대학원 등의 현실적인 고민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대에 다녀와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문득 KAIST와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한 번쯤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KAIST에서 2년간 나는 전공 지식은 많이 늘었지만 “나”에 대한 지식은 고등학교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과 함께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며 나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차피 군대 가야 하는데 굳이?’라 말하고 스쳐 지나갔을 생각이지만 이번에는 “굳이?”가 아닌 “굳이!”라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군대에 가야 하지만 굳이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고, 경험해 보자는 마음으로 유럽의 중심, 독일에 있는 뮌헨 공과 대학(TUM)에 지원하게 되었다.
뮌헨으로 떠나기 하루 전날, 드디어 내가 뮌헨에 간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TUM에서 수업을 듣고 뮌헨 거리를 거니는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파란 하늘 아래 유럽 감성의 건물들,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며 행복한 하루들이 나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들뜬 마음과 함께 독일로 향하였다.
뮌헨에 도착한 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뮌헨의 봄은 내 기대와는 달리 매우 흐렸다. 파란 하늘 대신 햇빛 하나 없는 흐린 날씨. 설상가상으로 하늘에선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무거운 캐리어들과 지친 몸을 이끌고 기숙사 열쇠를 받으러 갔다. 열쇠를 받고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중 그곳에 있던 외국인 친구가 나에게 갑작스레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머릿속 영어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고 말을 더듬었다. 그랬더니 그 외국인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Do you have a social anxiety?”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기분이 너무 안 좋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에 도착하여 짐을 두고 생각했다.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많이 다른데…?’ 마냥 즐거울 것으로 생각했던 교환학생 생활은 첫날부터 그 기대가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내 실망스러운 마음과는 달리 그 이후로도 이틀 동안은 흐린 날이 계속되었다. 첫 3일 동안은 좋지 않은 날씨와 싱숭생숭한 마음과 함께 주로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뮌헨에 온 지 3일째 되던 월요일, 그토록 바라던 파란 하늘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개강 전 2주 동안 진행되는 친목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여러 외국인 친구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날씨도 맑고 좋은 외국인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는데,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날 기숙사에 돌아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분명히 뮌헨에 오기 전에 내가 그토록 원하던 상황이 왔음에도 그렇게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내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교환학생에 왔으니 행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첫날 큰 실망으로 바뀌었고 그것 때문에 이렇게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는 행복한 순간보다 슬프고 화나는 순간들을 더 잘 기억한다. 그리고 행복함은 쉽게 무뎌지지만 슬픔이나 분노는 그리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슬프고 화나는 한순간 때문에 행복을 놓치는 경우가 있고 그게 바로 당시의 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새로운 환경에 왔다는 이유로 당연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 정도는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매일매일 날씨가 좋을 수는 없는 것처럼 행복하지 않은 날이 있을 수 있다.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도 우리의 하루들의 일부이며 흐린 날들이 있기에 맑은 날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당연히 맑은 날이 더 많으면 좋겠지만 우리의 하루들 중 흐린 날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맑은 날이 왔을 때 그를 온전히 즐길 방법인 것 같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남은 2주간의 프로그램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더 편하게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흐린 뮌헨 날씨조차도 즐겼다. 당연해서 쉽게 놓칠 수 있었던 깨달음. 이것이 뮌헨에 오고 나서 나의 첫 번째 깨달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