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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el Feb 27. 2023

두 번째 파리행 - 집에 머무는 시간

작년 11  번째 파리행  몬트리올에 돌아가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보낸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우연의 일치인지 저번에 지냈던 큰 공동묘지 Pere Lachaise 곁에 있는 똑같은 모델 아파트먼트에 머물게 되었다. 도착해 내가 남기고 갔던 물병, 발사믹 식초, 샴푸 등을 발견하니 마치 집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자주 갔던 바로 길 건너에 있던 유기농 식료품점에 가 내가 좋아했던 오트밀크와 그레놀라를 샀다. 전철 역으로 향하는 길에 있던 가봤던 카페들, 가보고 싶었던 레스토랑들에 가고 이제 구글지도 없이도 길 잃을 일 없이 근방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돌아온 모델 아파트먼트

처음으로 파리에 왔을 때의 설렘이 가시고 날씨는 아직 을씨년스럽고 공기오염도 그대로였다. 촬영이 있는 날은 대부분 온종일 이어지는 긴 일정 끝에 지쳐 바로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자기에 바빴다. 쉬는 날에도 언제 에이전시에서 캐스팅에 바로 가야 한다는 이메일이 날아올지 모르니 캐스팅에 필요한 포트폴리오와 하이힐 없이 멀리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산책을 나가거나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거나 집에서 운동하며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브랜드 광고 촬영을 하고,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도시라 불리는 파리에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가장 날 이끌리게 한 것은 깨끗하고 편안한 집이었다. 생각해 보면 난 어릴 때부터 집에 있는 것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발코니에서 모래놀이를 하며, 욕조에서 인형들을 씻기며, 방에서 인형놀이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도 늘 집에 와 책을 읽고 피아노를 치고 맛있는 걸 먹는 게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어 집에 자주 올 수 없었을 때는 방과 후를 틈타 탈출 작전을 펼쳐 잠깐이나마 집에 와 엄마 밥을 먹고 낮잠을 자곤 했었다. 해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며 방학이나 휴일 때만 집에 올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집에서의 하루하루가 소중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항상 곧 다시 떠나야 했기에 불안하고 집이 마냥 집 같지 않을 때도 있었다.


캐나다에서 대학을 끝마치고 모델 일을 시작하며 한 곳에 오래 머물며 나의 또 다른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있게 되었다. 한국의 집처럼 가족이 있고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첩이나 장난감이 있고 엄마 밥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온전히 내 공간에 내 물건들을 놓고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푹 놓였다.

지난 몇 년간 서울에서 캐나다로, 캐나다를 가로질렀다 스페인으로, 다시 캐나다의 또 다른 도시로 옮겨 다니며 사느라 꼭 집 없는 신세와 마찬가지였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기대에 부풀어 처음 집을 떠났을 때의 기대와 긴장이 그간의 여행 동안 쌓였던 피로와 힘듦을 덮어씌우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코로나 사태와 겹쳐 의무적으로 집에 있어야 한다는 소식이 나에게는 답답하기보다 반갑게 다가왔다. 건강히 잘 챙겨 먹고, 꾸준히 운동하고, 달리 특별한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며 평안하기 그지없었다. 학교도 끝마쳤고 해야 할 일이라곤 앞으로 무얼 할지 생각해 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고요함도 잠시 모델일을 몬트리올에서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난데없이 파리로 행하게 되었다. 모델일이야말로 앞날이 불확실하고 오늘내일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있을지 모르는 직업이다. 이번 년에는 런던, 밀라노, 최종적으로 뉴욕에도 에이전시를 구하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일하는 것이 나를 위한 에이전시의 목표라고 한다. 모델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기대하고 어릴 때부터 항상 꿈꿔왔던, 세계를 돌아다니며 얽매이지 않고 사는 자유로운 삶! 그야말로 내가 바라왔던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집이다. 하루빨리 언제 어디서 정착해 살게 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집에 머무는 시간이 주는 익숙함과 편안함을 누리며 살고 싶다. 내가 좋아하고 몸에 맞는 음식들을 꾸준히 챙겨 먹고 싶다. 집에서 항상 운동을 꾸준히 하고 싶다. 집에서 책을 많이 읽고 싶고 모델일 외에 하고 싶은 일들을 위한 공부들에도 전념하고 싶다.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집이란 가족들이 있는 곳이다. 제주에서 꼭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오랫동안 나는 자유를 추구한다며 익숙한 것들을 탈피하고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쫓아왔다.  끝없는 회피와 모험이  자신을 찾고 발전시켜 주리라 믿어왔다. 살을 빼고,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다른 나라에서 살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무엇이든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이제는  모든 것들 끝에 집에 돌아와 짐을 풀고 덩그러니 앉아있는  자신 그대로를 아껴야  시간이라고 느껴진다. 언제 어디서든 집에 있을 때의 나로서 살아갈  있다면 앞으로 다가올 여행들과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들이  버거워지고 여유로움을 잃지 않을  있기를 바란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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