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을 겪는 주니어가 적어내린 편지
2022년 새해가 밝았을 때, 나는 의식처럼 하는 것을 또 하러 갔었다. 학교 근처 시장에 있는 사주 집에서 신년 운세를 보는 것이다. 친구들과 다 같이 사주를 보러 갔는데, 그때 그 사주 선생님은 내게 그랬다.
"주변에 자기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을 거야. 자기한테 일 주는 사람. 그 사람 말만 믿고 따라가요. 올해부터는 전에 없던 게 들어왔어. 이 사람이 내 노후 대책이라는 거야. 기존에 자기가 봐왔던 패턴의 사람이 아니야. 더 어른스럽고 더 고지식하고 더 단단한 사람일 거야. 그 사람이 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게 조언을 해줄 거야. 그 사람을 잘 따라다녀야 돼."
대표
며칠 전에 책을 읽었다. 제목은 <계속 가봅시다 남는 게 체력인데>. 저자가 레퍼런스로 삼은 리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리더에 대한 존경심이 자신을 동기부여해 줬다고 말했다. 독자인 내가 보기에 그가 묘사하는 리더의 모습은 멋졌다. 그런 리더가 있다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같이 계속 일해보고 싶겠지. 나도 그 기분을 알아서 공감이 됐다.
사실 나는 그런 리더를 이제 잃어버린 상태인 것 같다. 부정적인 추측을 하는 이유는 그분에게 보낸 연락에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확인을 하셨는지조차도 겁나서 보지 못했다. 그 탓에 하고 싶은 변명이 입안에 가득한데, 그걸 이야기할 기회가 없어 답답하다. 변명하고픈 욕구에 충실하고 싶다.
욕구에 충실하고 싶어질 때, 팝콘을 사다가 먹는 버릇이 있다. 팝콘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혼잣말을 하는데, 늘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을 때 선택하는 방법이다.
에어팟을 끼고 누군가와 통화하는 척하며 혼자 중얼중얼 편지를 쓰는 듯이 말을 이어가며 걸었다. 저녁 공기에서는 어느덧 찬 기운이 덜해지고 봄기운이 느껴졌다. 혼자 걸으면서 나는 이 말을 들어주길 바라는 사람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따뜻한 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편안하게 잘 지내고 계실까요?
직장에서 OO 님을 만난 건 제게 너무나 행운인 일이었어요.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큰 감동을 느껴요. 정말이지 언제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OO 님이 떠나실 때에는 모든 팀원이 아쉬워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각자 성장에 힘을 쏟도록, 더 큰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도록 코칭해 주셨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일 거예요.
어느 날에는 당부하셨지요. '여러분, 저와의 시간은 짧아요. 그러니 책으로 스스로 코칭 하세요.' 사실 그때는 절박하지 않아 잠시 감격하고 금세 잊고 있었습니다. 회사 안에서 보고 배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바빴을 때였으니까요. 하지만 작년을 기점으로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저는 그때의 말씀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저의 성장을 책임져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외로움과 불안함을 느꼈거든요.
정신없이 일했던 날에 퇴근길에 신논현 교보문고에 들렀습니다. 매대를 쭉 살펴보다가 필요한 책들을 골라 집에 왔어요. 잠들기 전에도, 출근길에도, 퇴근길에도 틈틈이 책을 읽었고 한 권씩 읽을 때 잠시나마 생기 넘친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어요. 최근 수 개월은 무언가 꾹 참고 견디는 시간이었고, 저를 살아있게 해준 것은 독서였어요.
그때 기꺼이 조언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 순간이 저를 지금으로 이끌었어요. 이제 저는 책을 읽을 때면 OO 님 생각을 합니다. 계시지 않은 곳에서도 스스로 코칭 하는 방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제 약점을 인정하는 방법도요. 여전히 가끔 궁금합니다. 겨우 만난 지 3개월이었는데, 어떻게 저의 약점을 알아보고 말을 걸으셨어요? 저는 꽁꽁 숨기고 있어서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저의 약점을 그렇게 알아보고 챙기셨어요.
제게 그러셨죠. 일하다가 눈물이 나면 얼른 말하라고요. 지금이 그렇습니다. 여전히 그래요. 결국 번아웃을 맞이했습니다. 일하다가 눈물이 나고요, 호흡조차 버거워 짧게 내쉬어야 숨이 쉬어질 때도 있어요. 아무도 저를 보호해 주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발 내딛는 것도 너무 무서워요. 제가 발을 딛는 곳에 절벽이 있을 것 같아요. 그대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아요. 돈 버는 일이 이 일만 있는 건 아니다, 하고 싶지 않게 되면 얼마든지 그만둬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새로 옮기신 곳으로 저를 불러주셨을 때, 무척 기뻤습니다. OO 님은 제 멘토이시고 여전히 제 리더이셨으니까요. 그런 분께 인정을 받았다는 점이 무척 의미 있고 감사했어요. ‘우리 팀’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남아있어서, 견디는 게 전부인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날지도 몰라서, 무척 매력적인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최종적으로 저는 또 한 번 깨달았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고요. 최종 제안에도 불구하고 합류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날 길게 연락을 남겨두었지만 보셨을는지, 저는 알진 못해요. 겁이 나서 다시 들여다보질 않았거든요. 답변이 없으셨으니, 바쁘셨을 수도 있겠고 혹은 할 말이 더 이상 없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로 가끔은 제가 아직 미숙해서 좋은 것과 아닌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던 게 아니었나, 그래서 건네주신 감사한 기회를 제 손으로 놓치고, 실망시킨 것이 아닐까... 스스로 자꾸 의심해버렸습니다. 그 이후로 공휴일이나 명절이 되면 연락을 드릴까 어찌할까 계속 망설였습니다. 혹시 제게 실망하셨을까 싶어서 너무너무 겁이 나서요. 지금도 무척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적어요.
그래도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고 싶어요. 제 결정이 옳았는지, 혹은 잘못되었는지는 시간이 알려주겠지요.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라나는 게 사람이잖아요. 그때 제 선택은 제가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확신이 없는 상태로 OO 님만 믿고 결정을 내렸다면, 그 이후 제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 될 때마다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 같아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저는 제 결정을 믿고 싶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제 결정을 옳은 결정으로 만들어 내고 싶어요.
어쩌면 이 편지는 그걸 해냈을 때에야 보낼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쯤 보내게 될지 기약도 없는 편지를 작은 공간에나마 내놓습니다.
따뜻한 봄이 또 왔습니다. 일하다가 눈물이 나면 얼른 말하라고 하셨던 게 작년 봄인데 말이에요.
지금 저는 울면서 일을 하지만요. 언젠가 눈물이 적어지거든 그때 편지 부치겠습니다.
2023년
어느 화요일 밤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