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국 Mar 05. 2023

[43] ‘천재타자’ 강혁, 이중등록과 KBO 영구실격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한양대와 프로야구 OB 구단의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렸던 강혁이 프로선수의 자격을 박탈당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0일 강혁을 영구실격선수로 지명 공시했다. 이로써 현재 한양대 선수로 뛰고 있는 강혁은 대학 졸업 후에도 프로에 진출할 수 없게 됐다.』 <동아일보 1993년 4월 20일자>


1993년은 루키 김경원의 맹활약으로 6년 만에 가을 잔치 무대에 나가는 기쁨도 만끽했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슈퍼루키 강혁이 스카우트 파동 속에 OB 유니폼을 입지 못하는 아픔을 간직한 해이기도 하다.


[베팬알백] 43번째 주제는 신일고 시절 ‘천재 타자’로 각광받던 강혁의 OB 입단 무산과 KBO 최초 영구실격 이야기다. 베어스 구단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야구사에 일대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크나큰 사건이었고, 아픈 상흔이었다.


강혁의 현역 시절 모습 ⓒ두산베어스


1992 고졸 야수 최고대우 화려한 OB 입단식


“야, 영구결번 된 내 번호 10번까지 너한테 물려준다. 프로에서도 최고의 선수가 돼라.”


1992년 9월 19일 토요일. 페넌트레이스 종료 하루 뒤였다. 이날 잠실야구장 내 OB 구단 사무실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남자다운 기백을 자랑하는 OB 윤동균 감독은 특유의 호탕을 웃음을 터뜨리며 한 고교 선수에게 10번이 달린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혔다.


OB는 하루 전 대구에서 삼성에 4-9로 패하면서 5위로 페넌트레이스를 마감했다. 비록 4위까지 주어지는 포스트시즌 진출 티켓을 따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윤동균 감독 부임 첫해에 2년 연속 최하위에서 탈출한 것만 해도 의미가 컸다. 더군다나 이날은 신일고 강타자 강혁의 정식 계약식이 거행됐기에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10번은 윤동균이 1989년 프로 선수 최초로 은퇴식을 할 때, OB 구단이 영구결번으로 처리하기로 한 의미 있는 번호. 그러나 윤 감독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번호를 고교 선수에게 기꺼이 내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10번이라고 하면 당시 최고 좌타자를 상징했다. 일본프로야구 통산 최다안타(3085개)를 기록한 재일교포 장훈이 달았던 번호로, 한국에서도 야구 좀 한다는 좌타자들에겐 선망의 번호로 통했다. 윤동균뿐만 아니라 ‘타격의 달인’ 장효조가 달았고, ‘악바리’ 이정훈과 ‘양신’ 양준혁 이 달고 뛰었다. 각 구단에서도 아무에게나 10번을 허락하지 않던 시대였다.


현역 시절 10번을 달았던 윤동균. 영구결번으로 처리하기로 한 10번을 강혁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두산베어스


강혁이 누군가. 어릴 때부터 야구판에 소문이 자자했던 천재 중의 천재. 북한산 자락에 있는 서울시 강북구 백운초등학교 3학년 때 체육선생님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한 뒤 투수면 투수, 타자면 타자, 못하는 게 없었다. 백운초 시절엔 투수가 아닐 땐 왼손잡이 유격수로 나섰을 정도로 독보적인 운동 센스를 자랑했고, 신일중과 신일고로 진학해서도 늘 ‘일등 야구선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어깨 부상으로 투수는 포기했지만, 타격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신일고 2학년 때인 1991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0.615의 타율로 타격상을 받았고, 청룡기에서도 타격왕에 올랐다. 그리고 2학년 신분으로 쟁쟁한 3학년들을 제치고 고교 최고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다.


3학년에 올라가서도 대붕기에서 사이클링히트를 포함해 타격상(0.646)과 최다안타상을 휩쓸었다. 그해 전국대회 31경기연속안타를 작성해 고교야구 역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강혁이 5할을 치면 부진하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OB는 1990년과 1991년 구단 창단 후 처음으로 2년 연속 최하위 수모를 당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1990년 1차지명을 한 초고교급 투수 김경원이 중앙대로 진학하는 등 암흑기 동안 스카우트에서 유독 재미를 보지 못했다. 옆집 LG는 주사위 던지기를 하는 족족 이겼고, 스카우트를 하는 족족 대박을 터뜨려 대조를 이뤘던 시절. 그래서 OB 구단은 강혁만큼은 놓쳐서는 안 될 대어 중의 대어로 판단했던 것이다.


윤동균 전 감독(현 일구회장)은 당시를 돌아보며 자신의 10번을 물려준 기억을 더듬었다.


“강혁은 신일고 시절에 타격 능력이 대단했죠. 게다가 좌타자잖아요. 그래서 구단에서 영구결번시키기로 한 제 번호 10번까지 흔쾌히 내주기로 했습니다. 그만큼 기대가 컸어요. 신일고의 강혁, 그리고 다음해에 졸업하는 배명고 김동주까지 잡으면 둘은 곧바로 OB 클린업 트리오에 들어간다고 봤어요. 아, 심정수도 있었죠. 심정수는 동대문상고 직속 후배니까 제가 직접 만나서 잡아온 기억이 납니다.”



한양대 가계약과 OB 구단 정식 계약

한양대와 OB베어스의 영입 쟁탈전이 붙었던 강혁 ⓒ두산베어스


사실 강혁에 대해 OB보다 먼저 손을 쓴 쪽은 한양대였다. 1992년 3월에 이미 신일고 3학년에 올라간 강혁에게 다음해 한양대 입학 시 3000만 원의 장학금(프로구단의 계약금조)을 주겠다며 ‘가계약’을 했다. 정식 계약서를 쓴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약속을 한 셈. 여기에 용돈과 장비 구입비 등도 지원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런 가운데 OB가 강혁 영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강혁의 신일중 시절 감독을 맡았고, 신일고 시절엔 야구부장으로 사제의 연을 이어간 양승호 스카우트(전 롯데 감독·현 고양 위너스 총괄단장)를 내세워 강혁과 부모님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6월 26일. 초여름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OB 구경백 운영과장(현 일구회 사무총장)과 양승호 스카우트는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강혁의 집을 찾아갔다. “혁이라면 프로에서도 곧바로 성공한다”고 장담하면서 “한양대보다 무조건 더 많은 계약금을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리곤 강혁의 집 안방에서 마침내 계약서 사인을 받아냈다.


계약금 4000만 원과 연봉 1200만 원. 이는 어디까지나 언론 발표용이었다. 실제 계약금은 6000만 원이었다. 1991년 LG 1차지명을 받은 대졸 송구홍(선린상고-건국대)이 5000만 원으로 역대 야수 최고 계약금을 받았다. 이어 1992년 삼성 2차 1라운드에 지명된 대졸 동봉철(신일고-중앙대)이 5300만 원을 받아 송구홍의 기록을 다시 썼다. 그런데 대졸도 아닌 고졸 야수에게 역대 야수 최고 계약금 6000만 원을 안기로 했으니 당시 강혁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계약 시점이었다. 당시 프로-아마 협정서 2조4항에 ‘고교를 졸업하는 선수와 프로 구단은 아마 시즌이 끝나는 11월 1일부터 15일까지 접촉하고 입단계약해야 한다’고 명시해 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OB로선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한양대가 이미 3월에 가계약을 했고, OB의 움직임을 간파한 한양대 측이 굳히기에 들어가려 하자 OB로서도 강혁 측과 빨리 정식 계약을 해 쐐기를 박아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6월 26일 계약서에 사인을 받아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발표 시점이 고민으로 다가왔다. 최소한 11월 1일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당시 OB와 강혁의 입단계약 소문이 세간에 나돌기 시작했다. 결국 OB 경창호 사장은 페넌트레이스 종료 하루 뒤인 9월 19일 계약 사실을 발표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강혁의 OB 입단 계약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면 한양대가 포기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또한 빨리 발표를 해야 한양대 측이 다른 선수를 스카우트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한양대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일이 계산대로만 돌아가지 않았다. 한양대가 곧바로 “프로-아마 협정 위반”이라며 OB에 항의했다. 여름에 강혁의 집에서 계약을 하며 찍은 사진이 화근이었다. 사진에 ‘92. 6. 26’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던 것. 한양대 측에서 그것을 문제 삼아 “OB와 강혁의 계약은 원천 무효”라며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반면 OB는 “당사자와 부모님 입회 하에 정상적으로 체결한 계약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한양대는 강혁과 강혁 부모, 신일고 측에 동시다발적으로 회유와 설득 작업을 이어갔다. 강혁 측에서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문제는 신일고 동기 야구선수 2명이 함께 한양대로 가기로 돼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시엔 대학이 고교 특급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끼워넣기’ 식으로 친구 몇 명을 받아주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져 있었다. 한양대뿐만 아니라 운동부가 있는 모든 대학이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설계가 다 틀어지게 되자 한양대에서는 강혁의 마음을 가장 흔들 수 있는 친구 문제를 걸고넘어졌고, 이미 한양대와 얘기를 마친 신일고에서도 “강혁의 대학 진학이 이뤄지지 않으면 야구부를 해체하겠다”고 위협했다.



강혁의 프로행 번복과 강혁 숨기기 작전

강혁의 이중등록 당시 상황을 담은 1993년 동아일보 기사



OB 입단식이 열린 뒤 열흘 남짓. 강혁은 10월 2일 돌연 프로행을 번복하게 된다. 강혁과 강혁의 부모, 신일고 관계자들이 OB 구단 사무실을 찾아가 한양대 진학 의사를 밝히면서 계약을 취소해 줄 것을 요청했다. “4년 후에는 꼭 OB에 돌아오겠다”며 선처를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OB 구단으로서도 이미 계약을 한 이상 취소를 해줄 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러자 한양대는 그때부터 강혁 숨기기 작전에 돌입했다. “11월 1일에 앞서 계약한 것은 무효”라면서 OB와 강혁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 한양대 1년 선배인 차명주의 부산 집에 강혁을 빼돌린 것. OB는 강혁이 마무리훈련 캠프에 나타나지 않고 연락도 닿지 않자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물론 그해 고교 야구선수 쟁탈전이 OB와 한양대 사이에서만 벌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광주진흥고 3학년 이대진도 고려대에 가기로 돼 있었지만 해태와 이미 계약을 했고, 공주고의 노장진과 유신고의 최영필 등에 대해서도 연고 프로 구단과 대학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1990년대 초반, 당시엔 야구선수는 대학을 가서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 엘리트 코스로 여겨지던 시절이다. 간간이 초고교급 선수에 한해 프로와 대학이 스카우트 싸움을 벌이기는 했지만 대부분 승자는 대학이었다. 92학번만 하더라도 임선동(연세대)이 그랬고, 조성민(고려대)이 그랬다. 손경수(홍익대), 박재홍(연세대) 등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대학에서 프로보다 더 많은 계약금을 안겼다.


그런데 1년 만에 프로와 대학간의 스카우트 전쟁이 더 격화됐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992년 롯데 염종석(17승)과 빙그레 정민철(14승) 등 고졸 신인들이 첫해부터 맹활약하면서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혁혁한 공을 세우자, 프로 각 구단들이 너도나도 금전 공세로 고졸 선수 영입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고졸 선수 계약은 11월 1일부터 15일까지. 프로 구단과 스카우트 싸움을 벌이던 각 대학들이 주요 선수들을 잠적시켰다. 고려대는 손민한(부산고), 경희대는 최영필(유신고), 원광대는 노장진(공주고), 단국대는 이병규(장충고) 등을 바닷가나 연락이 닿지 않는 외진 곳에 피신시켜 프로 구단과 접촉을 원천봉쇄했다.


11월 16일. KBO 고졸 신인 계약 선수등록 마감일이었다. OB는 강혁과 연락이 닿지 않았지만 이미 사인을 받아낸 강혁의 계약서를 KBO에 제출했다. 한양대에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시그널이었다.


그러자 한양대는 대학입학원서 접수 마감 이틀 전인 11월 25일, 강혁의 경영학과 지원 원서를 접수받았다. OB 구단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각자 갈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후 반전이 또 일어났다. 11월 마지막 날, 강혁이 직접 OB 구단을 찾아와 “죄송하다”며 사과를 하면서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한 것. 프로에 오겠다는 뜻이었다. 양승호 스카우트는 즉시 강혁을 조용호 스카우트의 차에 태웠다. 그리고는 지인의 소개로 전북 남원에 있는 한 별장으로 달려갔다. 대입 시험을 보지 않는다면 한양대 입학을 할 수 없으니 그때까지 숨어서 버티면 될 일이었다.


이번엔 한양대가 발칵 뒤집혔다. 3~4일쯤 도피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강혁의 아버지가 강혁에게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다”며 서울로 올라올 것을 종용했다. 한편으로는 “강혁이 납치됐다”며 경찰서에 실종 신고까지 하면서 강온 양면 작전을 펼쳤다.


경찰이 수사에 나서자 OB로서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OB 구단도 양승호 스카우트에게 “강혁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강혁과 아버지의 접선 장소는 한양대 인근. 정황상 한양대 측과 강혁의 아버지가 함께 있다는 뜻이었다. 양승호 스카우트는 강혁을 그곳에 내려줬다. 강혁은 한양대로 다시 들어갔고, 결과적으로 그 길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이 되고 말았다.



KBO 대한야구협회 이중등록사상 초유 KBO 영구실격

1996년 경향신문 기사


강혁은 겨울 동안 한양대에서 합숙 훈련을 했다. 이듬해 프로 구단들의 스프링캠프가 시작됐지만 강혁은 OB 캠프에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OB는 강혁을 포기하지 않았다. 계약 서류를 내세워 1993년 2월 27일 KBO에 선수등록을 마쳤다.


한양대 측도 물러서지 않았다. 3월 2일에 아마추어 야구를 관장하는 대한야구협회(현 KBSA)에 강혁을 대학선수로 등록했다. ‘이중계약’을 넘어 ‘이중등록’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졌다.


1993년 프로야구 개막은 4월 10일. 이에 앞서 대학야구가 먼저 기지개를 켰다. 4월 6일 강혁이 마침내 한양대 선수로 봄철대학야구리그 고려대전에 출전하면서 야구계는 다시 한번 커다란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한양대와 프로야구 OB 구단의 이중등록 시비를 불러일으켰던 강타자 강혁이 5일 한양대 유니폼을 입고 봄철대학야구리그전 고려대와의 경기에 1루수 겸 6번 타자로 출전함으로써 선수 자격에 대한 판정이 불가피해졌다.』 <동아일보 1993년 4월 6일자>


당시 강혁의 스카우트를 책임진 한양대 이종락 야구부장은 이에 대해 “지난 82년 최동원이 캐나다 프로팀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입단계약을 했었지만 계약금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자격이 유지돼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면서 강혁이 OB와 계약을 했지만 계약금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추어 선수 자격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OB는 결국 4월 6일 KBO에 강혁을 ‘임의탈퇴선수’로 공시해 달라고 요청한 데 이어 4월 19일 ‘영구실격선수’로 공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KBO는 이를 받아들였다. 프로야구 사상 초유의 ‘영구실격선수’라는 극약처방이 내려졌다.


『프로야구 OB 구단과 한양대간의 스카우트 분쟁에 휘말렸던 강혁이 다시는 프로무대에 서지 못하게 됐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0일 OB 구단의 요청을 받아들여 강혁을 영구실격선수로 공시했다. 현재 한양대 선수로 뛰고 있는 강혁은 이 조치에 따라 대학 졸업 후 프로선수로 뛸 수 있는 길이 막히게 됐다.』 <조선일보 4월 21일자>



만루에서 고의볼넷대학무대와 실업리그는 좁다


OB베어스에 입단한 뒤 강혁의 타격 모습 ⓒ두산베어스


강혁은 OB 구단에 “4년 후에는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KBO 차원에서 영구실격 처리된 신분이라 이때부터 불투명한 앞날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천부적 타격 실력은 어딜 가지 않았다. 대학에 가서도 초특급 타자의 위용을 자랑했다.


그가 어느 정도의 타자였는지를 알 수 있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3학년 시절이던 1995년 대학야구 춘계리그전 결승전. 한양대가 2-5로 뒤진 2회 2사 만루 상황에서 강혁이 타석에 들어섰는데, 당시 ‘제2의 선동열’이라는 평가를 듣던 아마추어 최고 투수 임선동(연세대)이 강혁에게 ‘고의볼넷’을 내준 것. 다음 타석 주자 없는 상황이 되자 임선동이 정면승부를 했는데 강혁이 홈런을 쳐버렸다. 앞선 타석의 밀어내기 고의볼넷 작전이 오히려 더 조명됐다.


강혁은 대학 4년간 내내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4학년 시절이던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한국은 아마추어 선수로 구성된 대표팀이 나섰지만 ‘역대급 멤버’라는 평가가 무색하게 1승6패로 참가 8개국 중 최하위에 그치는 수모를 당했다. 그 와중에 강혁은 미국전에서 선발투수 세스 그레이싱어(전 KIA)에게 홈런을 치는 등 0.429의 타율로 고군분투했다.


대학 4학년 시절 4할대 타율로 대학무대가 좁다는 것을 증명한 강혁. 신인드래프트가 열리기 전 KBO에 ‘영구실격 해제’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내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회신은 없었다.


1차지명에서 이병규(장충고-단국대)가 LG에, 이경필(배명고-한양대)이 OB에, 손민한(부산고-고려대)이 롯데에 호명받아 시끌벅적했지만 강혁의 이름은 불려지지 않았다. 이어 열린 2차지명. OB는 1라운드에서 롯데가 손민한과 저울질하다 포기한 진갑용(부산고-고려대)을 낚아채고, 강혁과 신일고 동기인 백재호(동국대)도 1라운드에서 한화의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강혁은 열외였다.


당시 일각에서는 “프로와 아마야구의 화해 차원에서라도 강혁에 대한 KBO의 영구실격은 철회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실제로 영구실격 문제를 풀기 위해 KBO와 OB 구단 실무자가 극비리에 논의를 하기도 했다.


강혁은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비롯한 메이저리그 몇몇 팀들의 오퍼가 들어왔지만 이를 뿌리친 채 KBO리그의 선처를 기다렸다. 그러나 답이 없자 결국 계약금 2억5000만 원을 제시한 실업팀 현대 피닉스(현대전자) 입단을 선택했다. 당시 부친의 지병이 악화돼 집안에 목돈이 필요했던 상황이어서 강혁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면서 KBO와 OB의 징계해제 검토도 무의미해졌다.


강혁은 실업리그를 폭격했다. 당시 실업팀들이 하나둘씩 해체되는 상황이어서 사실 실업리그 투수들의 수준이 떨어졌다. 거기서 강혁은 무의미한 ‘본즈놀이’를 하고 있었다. 실업팀에서도 국제대회만 열리면 늘 국가대표 단골손님으로 뽑혀 나갔다.



영구실격 족쇄 풀어준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강혁의 진로는 야구계와 팬들의 최고 관심사였다. 1999년 월간 SBS THE SPORTS 8월호 ⓒ두산베어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프로와 아마추어 야구는 모처럼 화해 무드를 조성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꼴찌의 수모를 만회하기 위해 프로와 아마추어를 망라한 ‘드림팀’을 구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프로 10명, 아마 12명을 선발했는데 프로 선수로는 KBO리그 스타플레이어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거 박찬호(LA 다저스)와 서재응(뉴욕 메츠 산하 더블A 세인트루시)까지 포함됐다. 성균관대 김병현과 경희대 홍성흔도 뽑혔고, 강혁은 실업팀 선수로는 유일하게 선발됐다.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투타에서 압도적 전력을 확인하며 목표대로 금메달을 따냈다. 강혁은 0.500(20타수 10안타)의 타율로 금메달 획득 선봉에 섰다. 홈런 1개와 2루타 3개, 6타점을 곁들였다. 1997년 프로 무대에 데뷔해 신인왕에 오른 동기 이병규(LG)가 0.560(25타수 14안타)의 타율로 한국대표팀 내 1위를 차지했고, 강혁은 쟁쟁한 프로 선수들을 제치고 2위로 뒷받침했다.


그러자 여론이 들끓었다. “아마야구에 썩히긴 아깝다”, “영구실격을 풀어줄 때도 됐다”, “6년이면 징계 줄 만큼 줬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이끌었으니 프로가 통 크게 양보하자”는 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언론에서도 연일 이 문제를 대서특필했다.


OB도 마음이 풀렸다. 1998년 고려대 김동주와 외국인선수 타이론 우즈가 입단해 1994년 데뷔한 심정수와 함께 ‘우동수 트리오’가 가동되기 시작했는데, 강혁까지 입단한다면 그야말로 최강 타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봤다.


OB는 결국 강혁과 함께 1999년 1월 4일 복귀신청서 및 탄원서를 KBO에 제출하면서 영구실격 철회를 요청했다. KBO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러나 강혁의 입단으로 OB 전력이 강화될 것을 염려한 몇몇 구단이 반발하고 나섰다.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영웅이기에 영구실격을 풀어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규약 상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당시 야구규약 제63조에 따르면 ‘총재에 의해 복귀신청이 허가된 임의탈퇴선수 혹은 유기 또는 무기한의 실격선수는 탈퇴 또는 실격처분 당시의 소속구단과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돼 있었다.


‘유기 또는 무기 실격’에 대해서는 언급돼 있지만 ‘영구 실격’이라는 단어는 없다는 얘기였다. 강혁이 1992년 계약 당시 OB에게 계약금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강혁은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프로 입단 하나만으로 프로야구 전체가 술렁일 정도로 강혁은 당시 한국야구계의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이에 KBO는 고문 변호사의 법리 해석까지 받았다. “강혁 선수가 복귀되는 경우에는 실격 당시의 구단에 복귀하는 것이 옳은 해석이다”는 답변을 들었다.


1999년 1월 12일 신년 인사차 조선호텔에 모인 KBO 8개 구단 사장단은 프로야구발전을 위해서 강혁의 복귀를 허용해 주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단, 절충점을 찾았다. ‘올스타전 종료까지는 뛰지 못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계약 문제로 신인 선수가 일정 기간 출전에 제한을 받은 것은 1985년 해태 선동열 이후 처음이었다.


1992년, ‘천재타자’ 강혁은 친구와 의리를 선택하며 한양대에 진학하면서 6년간 영구실격이라는 굴레 속에서 속울음을 삼켜왔다.


그리고 1999년 1월 29일. 베어스는 구단사무실에서 강혁에게 계약금 5억 원을 안기며 입단식을 다시 열었다. 1992년 9월 19일 입단식을 한 그 장소였다. 약 6년 4개월 만에 두 번째 입단식이 치러진 셈이었다. 등번호는 1992년 가을 입단식에서 윤동균 감독이 영구결번임에도 물려주려고 했던 바로 그 10번이었다.


그런데 1992년 가을과 달라진 것이 있었다. OB 베어스는 1999년 1월 5일부터 두산 베어스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1999년 입단식 때는 10번이 영구결번이 아니었다. 1994년 선수단 이탈사건으로 윤동균 감독이 불명예 퇴진하면서 영구결번에서 해제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계약금 5억 원은 KBO 역대 야수 최고 계약금. 2021년 신인 롯데 나승엽이 받으면서 타이기록을 세웠지만, 여전히 최고액으로 남아 있다.


한편, 강혁 스카우트 파동으로 인해 야구계에 해묵은 숙제 하나가 해결되기도 했다. KBO와 대한야구협회가 1999년 프로-아마 통일계약서를 만들면서 스카우트 분쟁을 방지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 이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만약 1993 바로 OB 유니폼을 입었다면?

1999년 팬북에 실린 강혁 소개글 ⓒ두산베어스


1998년을 기점으로 ‘우동수 트리오’를 장착한 OB는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홍성흔(경희대)을 1차지명한 데 이어 강혁까지 영입하면서 1999시즌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강혁의 프로 데뷔전은 계획보다 더 늦춰졌다. 의욕에 찬 나머지 입단 첫해 일본 쓰쿠미 스프링캠프에 참가해 수비 훈련을 하다 부상을 이은 것. 몸을 아끼지 않고 다이빙캐치를 하다 왼쪽 어깨 근육이 찢어지고 말았다. 캠프에서 중도 귀국해야만 했다. 이는 불운으로 점철된 강혁의 프로 시대를 암시하는 복선이었는지 모른다.


어깨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으면서 당초 올스타전 이후 프로 무대에 데뷔하려던 꿈도 미뤄졌다. 그리고는 시즌이 종착역에 다다른 9월 4일 잠실 LG전 때 마침내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강혁은 이날 4-4로 팽팽하던 9회초 2사 2루서 그동안의 울분을 토하듯, 우중간 펜스를 넘어가는 2루타를 날려 5-4 승리를 이끌었다. 데뷔 첫 안타를 결승타로 장식하자 “역시 강혁”이라는 찬사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곳곳에 가시밭길이 이어졌다. 2000년 시즌 초반부터 3할대 타율로 고공비행을 하며 신인왕 후보로도 거론됐지만 8월에 음주운전에 걸리면서 스스로 시즌을 망쳤다.


그리고 2000시즌 후 SK에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쌍방울 선수단을 흡수했지만 선수층이 얇은 SK의 전력보강을 위해 KBO 이사회에서 ‘한국시리즈 우승팀과 준우승팀은 보호선수 명단 외에 각 1명씩 창단팀 SK에 트레이드한다’고 결정했는데, 2000년 준우승을 차지한 두산의 21명 보호선수 명단에서 강혁의 이름이 빠진 것. 그러자 SK가 곧바로 강혁을 지명했다.


그런데 OB와 SK가 트레이드 머니를 두고 3개월간 실랑이를 벌였다. 좀처럼 합의가 되지 않으면서 강혁은 트레이드가 되고도 한동안 무적선수로 지내야 했다. 결국 양 구단이 이적료 6억7500만 원에 합의하면서 강혁에게 뛸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SK에서도 불운의 연속이었다. 2001년 시범경기에서 수비 도중 슬라이딩을 하다 왼쪽 어깨 회전근을 다쳤다. 통증을 참고 뛰며 시즌 초반 홈런과 타점 1위에 오르는 등 맹활약을 펼쳤지만 결국 어깨 회전근이 끊어져 6월부터 결장했고, 통증이 완화되지 않자 8월에 수술대에 올랐다. 그리고 1년이 지난 2002년 8월에서야 1군 무대에 복귀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사이 김기태가 2002년 삼성에서 SK로 트레이드돼 오면서 1루수 자리를 차지했고, 강혁은 백업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강혁이 SK 측에 트레이드를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강혁은 2007년 은퇴할 때까지 KBO 통산 428경기에 출장해 타율 0.249, 232안타, 18홈런, 115타점의 성적을 남기고 유니폼을 벗었다.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표였다'.



강혁의 OB베어스 선수 시절 모습 ⓒ두산베어스


은퇴 후 SK에서 코치 생활을 하던 강혁은 2015년 말부터 2017년까지 모교 신일고 감독을 지냈다. 현재 인천 청라에서 야구 아카데미(레슨장)를 운영하고 있는 강혁은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며 그 시절을 돌아봤다.


“어린 마음에 프로에 바로 가고 싶었는데 친구와 의리 때문에 대학을 가게 됐죠. 남들보다 어렵게 프로에 들어갔는데 이상하게 잘 풀리지 않았어요. 적응할 만하면 다치고, 야구할 만하면 또 다치더라고요. 세간의 관심이 나한테 쏠리면서 뭔가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 쫓기는 마음으로 야구를 했던 것 같아요. 난 고등학교 실력에 계속 머물러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죠. 항상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하면서, 늘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강혁이 1993년에 OB 유니폼을 입고 곧바로 프로에 데뷔했다면 어땠을까. 야구계에서는 강혁을 두고 항상 이런 반문을 하곤 한다.


스카우트 파동의 한가운데에서 지켜봤던 강혁의 스승 양승호 전 롯데 감독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시 신일중 신일고 제자들이 정말 야구 잘했어요. 92학번으로 조성민 설종진 등이 있었고, 그 밑으로 강혁 백재호, 그 밑으로 김재현 조인성 등이 있었죠. 그런데 그중에서도 강혁하고 1년 후배 김재현한테는 제가 프로에 바로 가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해줬어요. 김재현하고 동기인 조인성은 중학교 시절부터 ‘앉아쏴’를 할 정도로 포수로서 어깨가 탁월했지만 배트 스피드가 조금 떨어져 대학을 간 다음에 프로에 진출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죠. 아무튼 강혁하고 김재현은 타격이 고교 선수 레벨이 아니었어요. 둘 다 배트 스피드가 엄청났는데 강혁은 선구안 면에서 김재현보다 더 좋았던 선수였어요. 강혁이 프로에 바로 들어갔다면? 아마 프로 적응도 빨랐을 테고, 김재현보다 더 크게 성공했을지 모릅니다.”


‘비운의 천재타자’ 강혁. 어쩌면 KBO리그의 위대한 역사를 쓰는 대타자가 됐을지 모른다. OB 베어스의 역사도, 한국야구사도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42] ‘선동열급 루키’ 김경원의 등장과 암흑기 청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