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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Dec 18. 2024

4천 달러의 기회비용

'유(裕)'는 너그럽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너그러움은 남은(餘) 게 있을 때 부릴 수 있다는 반전이 있습니다. 그게 여유(餘裕)입니다. 돈이 많아도 너그럽지 못한 사람은 남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남에게 너그러울 마음이 남은 게 없어서 너그럽지 못합니다.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마을에는 운조루라는 고택이 있습니다. 15년 전쯤에 친구와 둘이서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낙안군수 류이주가 1776년에 사저로 지었다는 집인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통나무로 만들어진 큰 쌀뒤주입니다. 뒤주 아래에는 곡식을 뽑아낼 때 쓰는 구멍이 마개로 막혀 있었고 뒤주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집안사람이 아니라 해도 곡식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든 와서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집을 지키고 있는 종부 할머니의 말씀으로는 운조루가 지리산과 지척이지만 해방 후 정치적 혼란기에 공산 빨치산이 민가로 내려와 식량투쟁 활동을 할 때에도 운조루는 불타지 않고 오늘날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종부께서는 '타인능해'를 설명하면서 '여유의 미학'을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굶주린 이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곡식이기에 앞서 마음의 여유였습니다. 재벌기업들이 골목상권까지 모두 빼앗가 버린 우리나라 경제현실 속에서 '타인능해'에 깃든 '여유'의 정신은 비단 재벌뿐만 아니라 전 분야에 걸쳐서 모두 마음에 새겨야 할 금과옥조와 같습니다.



일본 식민지 36년을 거쳐 한국전쟁 후 세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이 80년 만에 세계적 국가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은 온 세계가 놀랄만한 일입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짙습니다. 이제 우리는 단기간에 이룬 발전이 함께 가져온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여유의 빛이 사라진 어두운 터널입니다. 수천 년간 배가 고팠던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배 고프지 아도 되는 경제를 이룬 나라입니다. 그러던 중에  경쟁이 체질화되어버린 탓인지 배 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여유 없는 국민들이 돼버렸습니다. 잘 살아보세~를 외치면서 모든 걸 바쳐버렸는지 남아있는 여유가 하나도 없나 봅니다.


지난 11월 프랑스, 이태리 여행 중 현지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찍는 이를 느긋이 기다려주는 행인들. 기다려주다가 지나가면서도 오히려 미소로 손을 흔들어 주고 가는 교양.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관광객이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는 운전자들의 저 질서. 참아도 나오는 땀과 재채기처럼 저절로 부려지는 자발성 여유가 정말 부러웠습니다. 도로, 주택 등 사회기반시설 모든 게 불편해도 아무런 불편을 모르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은 마음의 여유가 불편을 토닥토닥 달랜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가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나라의 국민소득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당연한 궁금증이겠습니다만 우리네 식의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겠습니다.


국가별 국민 1인당 GDP ( IMF 통계 자료 )

IMF(국제통화기금) 통계에 의하면 2024년 10월 현재, 세계 각국 국민당 1인당 GDP는 스위스 106,000달러, 미국 86,000달러, 영국 52,000달러, 프랑스 48,000달러, 이태리 40,000달러, 대한민국 36,000달러, 스페인 35,000달러, 일본 32,000달러로 나타납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제법 살만한 나라가 된 겁니다. 살만한 나라가 된 밑바탕에는 높은 교육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높은 교육열이 지나치게 높은 경쟁사회를 만들어버렸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학업 성적 순위로 평가받던 청소년 시절을 살다가 사회에 진출하고서도 출신학교, 직업, 재산 등으로 평가하고 평가받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잘 살겠다는 욕망이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이지만 이 욕망이 삶의 모든 것을 우선할 때 온갖 병폐를 만들어냅니다.  



프랑스 사람과 이태리 사람들에게 왜 돈을 버느냐? 는 질문을 면 여름에 바캉스 갈 경비를 벌기 위해서라고 대답을 한다고 합니다. 즐기기 위해서 돈을 번다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여유가 삶의 목표를 결정합니다. 경쟁사회에서는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남으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싶어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여유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이런 데서 생겨납니다.


프랑스인들의 주당근로시간은 36시간, 이태리인들은 35시간입니다. 네덜란드는 32시간입니다. 이 정도로만 일해도 경제적 현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40시간입니다.  '우리가 이태리보다 1인당 GDP가 4,000달러 낮지만 그래도 비슷하다, 우리도 이태리와 비슷한 경제 수준이다'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우리가 네 시간 더 일하여 이태리의 1인당 GDP와 같아진다고 해서 우리가 이태리만큼 경제적으로 잘 산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질문도 간단하지만 대답은 더 간단합니다. 대답은 딱 잘라서 'No'입니다. 기회비용이란  어떤 자원이나 재화를 이용하여 생산이나 소비를 하였을 경우, 다른 것을 생산하거나 소비했었다면 얻을  있었던 잠재적 이익.  어떤 일을  결과 그로 인하여 포기된 이익을 말합니다. '내가 오늘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을 봤는데 영화를 보는 대신 그 돈으로 콩나물을 샀으면 오늘 우리 가족들이 모두 맛난 콩나물 무침을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태리 사람들보다 주당 5시간을 더 일해서 1년간 4,000달러를 더 벌었다고 칠 때, 4,000달러는 우리의 '여유'를 포기하고 얻은 기회비용입니다. 여유를 포기하고 우리는 4,000달러를 더 벌 수도 있겠지만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의 경쟁과 불안과 긴장보다 더 큰 경쟁 속에 내몰려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태리의 경제수준을 따라잡는다고 이태리만큼 잘 산다는 건 전혀 아닌 것입니다.


여유란, 혈관 벽에 들러붙어 동맥경화를 일으키는 기름찌꺼기를 녹여내는 혈전용해제와 같습니다. 근래에 들어서 '워라벨(work-life valance, 일과 삶간의 균형)', '저녁이 있는 삶' 등으로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찾기 위해 애쓰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단기간에 표시가 날 정도로 우리의 삶은 달라지지 못할 것입니다만 늦게나마 이런 시도를 해본다는 것에는 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에선 과거를 절대시 하고 미래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사는 것을 어떤 과거의 결과로 볼 게 아니라, 미래를 개척하고 방향을 찾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태도가 바람직합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이 리더십을 가지게 되면 과거를 끌어안고 살게 됩니다.  

                              - 104세 철학자 김형석교수 인터뷰 내용 中, 조선일보 2024.12.17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면 긴장과 불안에 휩싸이고 불안하면 경쟁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나친 경쟁과 극단의 이기심은 정치계라고 피해가지는 않았습니다. 정당정치 구도 속에서 당파적 이기심과 권력욕은 증폭됩니다. 정치철학 없이 권력을 얻는 게 목적인 정치인들은 미래를 가벼이 보고 과거에 집착하여 정권 초기마다 '청산(淸算)'이라는 작업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청산이라는 게 우리나라와 같은 방식이라면 청산은 정치보복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는 길은 버리고 상대를 낮추어서 자신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려는 길을 선택합니다. 올바른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과거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과거 자체를 부정해버림으로 남는 게 없습니다. '역사왜곡'이라는 말 '역사부정'이라는 말이 과거를 끌어안고 사는 우리임을 증거하는 말입니다.


대한민국 건국시기를 두고 아직도 싸우고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교과서가 바뀔 때마다 건국시기가 달라집니다. 같은 국가 안에 살면서도 세대별로 건국시기가 다릅니다. 아버지의 나라 건국시기가 다르고 아들 나라 건국시기가 다릅니다. 부자간 다른 나라 사람입니다. 세대 간 갈등이 그래서 더 심합니다. 도대체 갈등 아닌 것이 없습니다. 빈부격차, 세대갈등, 남녀갈등, 건국시기, 친일청산 등으로 갈등을 겪지만 뜻이 모아지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지선다형 문제로 수없이 시험을 치르고 초중고 학업을 면서 찍는 훈련을 엄청나게 했건만 '오지선다 '으로 치르는 선거에서는 도장은 왜 그리 못 찍는지요. 잘못 찍었다고 자책과 후회 그리고 원망을 반복하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아마 누구를 찍었어도 반드시 따를 후회입니다. 여유가 부족한 국민들이 더 여유없는 자들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교육, 경제, 정치보다 더 우선시해야할 것은 여유입니다. 돈에 여유가 있고 땅에 여유가 있자원에 여유가 있다고 사회가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변하게 하는 것은 바로 마음의 여유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이 짧은 말속에 엄청난 진리가 들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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