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70대 후반의 할머니가 복잡한 시장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장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매일 다니는 노래교실에 가려고 지하철 역으로 가는 지름길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평소 건강관리에 많은 신경을 써왔고 식단도 잘 챙기고 운동도 열심히 해온 터라 나이에 비해 아주 젊어 보였습니다. 옷매무새도 세련미가 넘쳐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멋순이'였고 손주들과 손주 친구들에게는 멋쟁이할머니로 통했습니다. 앞모습은 얼굴 피부 때문에 나이와 얼추 비슷하게 보였지만 뒷모습은 영락없는 30대였습니다. 오늘도 멋쟁이 차림으로 사뿐사뿐 시장골목을 지나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같이 가~~ 처녀"
할머니는 잘못 들었나 하고 가던 길 그냥 가는데 처음과 똑같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내가 젊어 보이긴 하지, 매력적이긴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뒷모습보다는 앞모습에 자신이 없어서 부르는 사람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 못 들은 척 그냥 갔습니다.
다음날도 똑같은 일어났습니다.
집에 와서 고등학생 손녀에게 시장에서의 일을 얘기했습니다. 손녀는 할머니가 건강해서 젊어 보이긴 하지만 아가씨로 보일 정도는 아닌 듯했습니다. 손녀는 할머니에게 내일 보청기를 끼고 다시 시장 길을 걸어 가보라고 했습니다.
이튿날 할머니는 다시 시장 골목길을 걸어가며 어제, 그제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전에 들려오던 귀에 익은 그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보청기를 통해 생생하게 들려왔습니다.
"갈치가 천원, 싱싱한 갈치가 천원"
할머니 뒤, 생선가게에서 30대 젊은 남자 상인이 은빛 갈치를 들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거울을 이용해서 뒷모습을 볼 수 있거나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늘 뒷모습이 궁금합니다. 한 사람의 앞모습과 뒷모습이 주는 이미지는 전혀 다릅니다. 앞모습은 얼굴이 주는 이미지이지만 뒷모습은 체격 또는 몸매입니다. 다른 사람의 앞모습을 볼 때는 눈을 보게 되지만 뒷모습을 볼 때는 특정 부분보다는 전체를 보게 됩니다. 마주쳐 지나간 사람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으면 그의 모습을 더 잘 말할 수 있습니다. 뒤에서 본 그 사람의 허리와 엉덩이가 확실히 구분이 되면 확실히 젊어 보입니다. 다리가 가늘어져 있으면 나이 들어 보입니다. 걸음걸이에서도 나이가 나타납니다. 넓은 보폭과 빠른 걸음은 젊음의 상징입니다. 바야흐로 온 세상이 '건강백세시대'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젊어 보이세요." "옛날과 변함이 없으시네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만날 때 하는 인사말도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잘하는 사람들은 앞모습만큼 뒷모습에도 많은 신경을 씁니다. 어쩌면 앞모습 이상으로 더 신경을 쓸 수도 있습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앞으로 봐도, 뒤태로 봐도 이쁜 '앞으로뒤태'라는 우스개말도 있습니다.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 우리의 시선은 앞 자동차의 뒷모습을 향해 있습니다. 로고를 보지 않고서 자동차 앞모양으로는 차종을 식별하기 어렵지만 뒷모습으로는 무슨 차인 지를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떠올리면 그 사람의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이 더 확실하게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리고 뒷모습이 더 오랜 시간 동안 기억에 남는다는 걸 아시는지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시인의 < 낙화(洛花) > 中
눈으로 보이는 뒷모습이 중요합니다만 느끼는 뒷모습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무대에서 죽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각오는 높이 살만하지만, 무대에 설 수 없을 나이가 되어서도 무대에 서려한다면 본인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난감한 일일 것입니다. 전쟁에 나선 군인이 적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것만큼 명예로운 일은 없겠지만 적 앞에서도 후퇴해야 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지난 1월 12일에 "박수 칠 때 떠나겠다" 하며 은퇴 공연을 했던 가황 나훈아는 팬들에게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고 무대를 떠났습니다. 건강, 외모, 가창력, 발성 모든 것이 '영원한 현역'일 수 있을 것 같아 보였고 팬들은 그의 은퇴를 못내 아쉬워했습니다만,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며 그는 떠났습니다. 《도덕경》 44장에는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만족을 알면(知足) 욕되지 않을 것이며(不辱), 그칠 때를 알면(知止) 위태로움에 처하지 않는다(不殆)는 뜻입니다. 누리던 이들은 적당한 시기를 살펴서 내려놓고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가수 나훈아는 아름다운 퇴장으로 '우리들의 영원한 가황의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뒷모습을 만들어주는 것은 앞모습입니다. 앞모습으로 어려운 지경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앞장서서 씩씩하게 나아갔고, 남들이 눈치 보며 옆걸음할 때에도 앞모습으로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평생 부은 적금이 앞모습이라면 뒷모습은 원금에 이자까지 더한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뒷모습을 가진 이는 자신의 살아온 삶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입니다. 끌고 간다기보다는 명예롭게 실려간다는 말이 더 맞겠습니다. 군대에 간 아들을 면회하고 돌아서는 부모의 뒷모습을 아들은 평생토록 잊지를 못합니다. 부모의 뒷모습에서 하늘 같은 은혜와 사랑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하는 포옹보다는 뒤에서 안는 백허그에 더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뒷모습이 아름답지 않은 사람은 가면을 쓴 앞모습으로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태평양전쟁의 영웅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의회에서의 고별연설을 하면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고 했습니다. 마중보다는 배웅에 더 진심이 담겨있습니다. 취임사는 짧아야 하지만 고별사는 길어도 괜찮습니다. 은퇴는 끝이 아님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퇴장하기를 거부하며 버티려 합니다. 뒷모습에 자신이 없어서일 것입니다. 죽지 않고 서서히 길게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지겠다는 '老兵' 맥아더는 영원히 영웅으로 남을 것입니다.
시장 골목길을 지나며 '처녀' 소리를 듣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은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뒷모습에 마음을 두지 않고 살면 '처녀'같은 뒷모습이 아니라, '천원'짜리 갈치같이 보잘것없는 뒷모습으로 갈치 꼬리만큼 가냘픈 삶, 길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나태주
뒷모습이 어여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자기의 눈으로는 결코
확인이 되지 않는 뒷모습
오로지 타인에게로만 열린
또 하나의 표정
뒷모습은
고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물소리에게도 뒷모습이 있을까?
시드는 노루발풀꽃, 솔바람 소리
찌르레기 울음소리에게도
뒷모습은 있을까?
저기 저
가문비나무 윤노리나무 사이
산길을 내려가는
야윈 슬픔의 어깨가
희고도 푸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