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가치
(1부에 이어서)
시리즈물 <알렉산드로스:신의 탄생>을 시청하면서 끊임없이 드는 생각은 '젊음'의 가치입니다. 계란을 세우는 방법을 묻는 이들 앞에서 콜럼버스는 계란의 밑부분을 깨트려서 세웠다지만, 20살의 청년 알렉산드로스는 콜럼버스보다 1800여 년 전에 아무도 풀지 못하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칼로 내리쳐 끊어 보였습니다. 역발상(逆發想)과 창의성은 젊음이 주는 선물입니다. 젊음의 가치는 용감, 과감이요 때로는 무모함에 가까운 모험입니다. 창대한 역사적 사건들이 대부분 미약한 무모함으로 시작된 것이라면 젊음의 가치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립포스 왕은 당대 최고의 석학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아들의 미래를 맡겼습니다. 한 사람의 미래는 그가 받은 교육에 달린 일입니다.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에서는 이타카의 왕 오디시우스는 트로이전쟁에 출정하기 전 아들 텔레마커스의 교육을 자신의 친구 멘토르(Mentor)에게 맡기고 트로이로 떠났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필립포스 왕과 막역한 사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는 멘토르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멘토(mentor)라는 단어도 이렇게 생겨난 것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역사, 군사, 예술, 수사학, 문학을 사사하면서 지중해권 밖의 세상이 늘 궁금했습니다. 길고 긴 원정을 갔다가 다시 돌아올 자신이 있었던 나이의 젊음과 체력이 그의 호기심과 꿈과 환상을 실어 나르는 날개가 되어주었습니다. 특히, 가까운 지중해 세계보다는 전설처럼 신화처럼 들려오는 동방의 세계는 그에게 대제국 건설의 꿈을 더욱 키웠습니다.
약관 20세의 나이에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는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 오리엔트 원정을 시작합니다. 그가 동방으로 나아가는 길목에는 대제국 페르시아가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동방의 나라 인도로 가려다가 우연히 신대륙을 발견하였지만, 알렉산드로스에게 페르시아는 우연이 아니라 넘어야 할 필연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동문수학한 친구 헤파이스티온과 프톨레마이오스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왕의 참모로서 친구로서 동방원정을 함께 떠났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를 "알렉산드로스와 헤파이스티온은 한 마음을 두 육체로 나누어 가지고 태어난 사이"라 했고, 사실 알렉산드로스 자신도 헤파이스티온을 가리켜 "또 다른 나 자신"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대뿐 아니라 후세의 사람들에게도 둘의 사이는 우정을 넘어 연정을 품은 사이였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시리즈에서는 친구와 정치적 군사적 동반자 이상의 사이임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고증할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학연지우이자 대제국 건설의 꿈으로 의기투합한 알렉산드로스, 헤파이스티온, 프톨레마이오스. 세 사람의 뜨거운 피는 '도원의 결의'로 형제가 된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중국 중원통일의 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기원전 336년 이수스 평원에서 알렉산로스의 마케도니아 군대와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 제국 군대는 두번째 맞대결을 벌입니다. 자신의 군대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군대를 이끌고 '애송이' 왕이 자신에게 도전해 왔을 때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를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강아지에게, 애송이에게 인생을 두 배 가까이 더 산 범이, '노장'이 무참히 무너지고 맙니다. 혈기왕성한 청년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애마 부케팔로스를 타고 늘 전장의 선두를 달렸습니다. 치고 찌르고 빠지고 달리며 주인과 말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선두를 달리는 사자 같은 왕의 뒤를 용맹스럽게 따라 달리는 병사들 또한 사자들이었습니다. 투구와 갑옷으로 왕이라는 것을 적군들이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아랑곳하지 적진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었습니다. 반면 페르시의 다리우스 3세는 늘 진영의 중간에 자리 잡았습니다. 중간에 있어야 엄청난 병력을 용이하게 지휘할 수 있었을 것이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몇 겹으로 호위병사들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군에는 왕은 보이지 않고 왕으로부터 전달되는 명령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사자가 이끄는 양의 군대였습니다. 이수스 평원은 무모하리만치 용감한 알렉산드로스에게서 뿜어 나오는 에너지로만 가득했습니다. 두 배에 가까운 군사를 가지고 싸웠지만 다리우스는 알렉산더에게 패해 도망을 쳤고 절치부심(切齒腐心)의 2년을 보내게 됩니다.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알렉산드로스는 패주 다리우스를 뒤쫓지 않고 군대의 방향을 틀어 페르시아의 속주가 되어있던 이집트로 들어갑니다. 이집트는 나일강이 선사한 지중해의 곳간이었습니다. 앞으로의 긴 정쟁에서 군사들을 먹일 수 있는 식량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장수의 책임이었습니다. 또 이집트에 들어가서 그곳을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제대로 접수하지 않으면 서쪽 페르시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을 때 뒤에 페르시아의 군대가 주둔하는 이집트가 알렉산드로스 자신의 뒤를 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한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지금도 우뚝하여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동서고금 보편의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잡은 포로 중에는 다리우스 3세의 왕비 스타테이라와 와 공주 바르시네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또 한 번의 대회전의 계약서였습니다.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신탁을 받기 위해 사막을 건너 지금의 리비아와 접경 지역 부근에 있는 '시와'라는 오아시스로 갑니다. 사막의 사제를 찾아가 이유를 시리즈물 중간에 출연한 캘롤린 윌키스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 신 아문을 모시는 사제를 찾은 이유는 뭘까요? 신을 바라보는 그리스인의 시각은 상당히 유연했어요. 신이 장소에 따라 다른 이름을 쓸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집트의 아문을 모시는 사제를 만났지만 그리스인들은 아문이 제우스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그 사제를 만남으로써 알렉산드로스가 제우스에게 인정받은 거나 다름없다고 믿었죠.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같은 신이니까요. -Dr. Carolyn Willekes(Mount Royal University, Calgary)
그곳에서 영험한 사제를 만난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사제 :
양이 이끄는 사자의 군대보다는 사자가 이끄는 양의 군대가 더 강한 군대입니다. 그러나 대왕의 군대는 사자가 이끄는 사자의 군대이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알렉산드로스 :
그렇다면 나는 늘 승리한다는 말이오?
사제 :
신의 뜻이옵니다.
이제까지 사자 같은 왕으로서 사자 같은 군대를 지휘해 온 알렉산드로스에게 사제는 앞으로도 그렇게 싸울 것이라고 합니다.
이수스 평원에서의 대결전 2년 뒤, 페르시아의 본거지 바빌론 근처 가우가멜라에서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는 또 한 번 대회전을 갖게 됩니다. 수적으로 열세하지만 알렉산드로스 왕이 직접 지휘하는 기병대는 전광석화였습니다. 페르시아 군대 일부를 유인해 내어 본대와 분리시킨 알렉산드로스는 본대와 멀어진 적을 깨부순 후 다시 본대를 공격하는 등 놀라운 기동력을 보입니다. 상승하는 기운을 가진 알렉산드로스를 꺽지 못한 다리우스는 또 도망을 갑니다. 두 번씩이나 도망을 친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보다는 24년 연상의 나이입니다. 알렉산드로스보다 나이가 더 들어서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후일을 기약하는 지혜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리우스에게 젊음의 가치, 용맹성은 없었습니다. 적진에 남겨두고 온 아내와 딸이 포로가 된 것 때문에 이성을 잃고 분노하여 다시 적진으로 뛰어드는 젊음의 가치(?), 무모함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적진에서 왕비와 공주가 지위에 맞는 대우를 받으며 잘 지낸다는 첩보를 듣고서는 질투인지 배신감인지 모를 야릇한 마음으로 알렉산드로스를 찢어 죽이겠다는 분노만 들어낼 뿐이었지, 만나면 도망쳐버리니 다리우스의 군대는 양이 이끄는 양의 군대였습니다. 도망을 친 다리우스는 따라온 군대도 없이 심복부하 베수스의 칼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집트에 가서 신이 된 영웅 알렉산드로스에 관한 다큐멘터리 <알렉산드로스:신의 탄생>은 <제6화 '정복은 끝나지 않았다'>로 끝납니다. 아직 인도 정복이 남아있으니까요. 시즌1의 부제가 '신의 탄생'이었으니 시즌2의 부제는 '신의 완성'일까요. '신의 죽음'일까요. 기대가 큽니다.
미인은 박명하고 천재는 요절합니다. 영웅이 천하영웅이 되면 하늘이 내린 영웅은 하늘로부터도 질투를 받나 봅니다. 질투의 끝은 박명과 요절입니다. 시와에서 만난 영험한 사제의 "신의 뜻입니다." 말은 이런 뜻이었을까요. 페르시아와 인도를 정복하고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세 대륙에 걸친 거대 제국을 건설한 젊은 영웅 알렉산드로스는 인도까지 정복을 한 후 본국으로 귀환 도중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뒤에 나타난 유럽의 영웅, 씨저와 나폴레옹 모두 알렉산드로스를 흠모하여 제2의 알렉산드로스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오리엔트 정복을 통해 이룬 그리스와 동방의 문화 융합은 지금도 인류사에서 '헬레니즘'으로 물줄기를 이루어 흘러가고 있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말입니다.
인류사에는 '청년과 노년의 대결'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젊음이 패기와 용기로 늘 노년을 이긴 것도 아니고 노년의 경험과 통찰이 반드시 승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의 승리는 자신의 나이에 맞는 역량을 시대 상황과 여건에 잘 접목시켜서 승리의 기회를 잡은 자의 것이었습니다. 장발장을 탄생시킨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40세는 청춘의 노년기이고 50세는 노년의 청춘기이다." 몸이 노쇠해도 마음이라도 젊어야 그나마 귀찮아하던 일도 하려 듭니다. 마음이 젊다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이 많다거나 가보고 싶은 곳이 많다는 것과 같습니다. 나이 들면 고집이 세진다지요. 변화하지 않으려는 게 고집일 텐데요. 변하는 데에는 적응이 필요하고 적응하는 데도 힘이 필요합니다. 이제 와서~라는 생각과 힘이 들어서 ~라는 생각의 기저는 노쇠이고 결과는 고집입니다. '다시 태어나면, 아니 십 년만 젊었어도'라고 말을 합니다. 몸만 젊어지려 하지 말고 젊은 기상을 사모해야 합니다. 젊은이는 늙지 않으려고만 하지 말고 나이에 맞도록 익어가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젊음의 가치는 창의성과 역발상을 해내는 에너지입니다. 그렇다고 젊음의 힘은 언제나 옳고 노년은 늘 퇴물인 것은 아닙니다. 아프리카에는 " 한 명 노인의 죽음은 하나의 도서관이 없어지는 일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노년의 가치는 경험과 통찰과 판단력입니다. 5월에 장미가 피고 10월에 국화가 피어나듯 인생의 5월에는 용기와 패기가 붉게 피어나고 인생의 10월에는 통찰과 그에 따른 판단의 열매가 익습니다.
애송이라 무시해서 안되고 꼰대라고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애송이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젊은이가 되어야 하고 꼰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품위를 가꾸고 지키는 노년이 되어야 합니다.
전쟁사는 청년과 노년의 한 판 싸움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59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고대 로마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제2차 포에니전쟁 당시 로마공화정의 국정운영 최고위직인 집정관이자 독재관이었습니다. 코끼리를 데리고 스페인의 피레네 산맥과 만년설산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온 한니발은 29세였습니다. 75만 명의 동원력을 가진 이탈리아에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가려 했던 한니발은 젊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전쟁사에서 전설적인 작전으로 회자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저지하러 달려온 로마의 집정관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59세였습니다. 젊은이는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발상을 했고, 노장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정면대결보다는 지구전으로 한니발을 막으려 했습니다. 미온적인 전투태세에 불만을 가진 로마인들은 사령관 교체를 원했고 새로 임명된 장군 바로는 칸나에 평원에서 카르타고 군보다 두 배 많은 병력으로 싸웠지만 76,000명 중 70,000명이 하룻만에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바로는 비천한 집안 출신으로 그의 생몰연도와 출생지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오스만제국의 21세 메흐매드 2세 술탄
동로마제국은 천년제국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산과 바다가 품은 천혜의 방어 진지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은 그 앞바다에 설치된 쇠사슬 때문에 해상으로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1세의 젊은 술탄 메흐메드는 바다에 설치된 쇠사슬을 피해 전함을 산으로 끌고 가 다시 콘스탄티노플 성 앞에 빠트리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썼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은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1453년 난공불락의 요새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노플은 포위당한지 53일 만에 함락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인류역사에서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러시아의 67세 쿠투조프
숙적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에 내린 대륙봉쇄령을 내렸습니다. 나폴레옹의 불호령이 두려웠던 전 유럽은 나폴레옹의 엄명을 거역하지 못했으나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길에 오릅니다. 러시아의 애꾸눈 노장 쿠투조프는 최강 프랑스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청야전술(淸野戰術)을 펼치며 나폴레옹을 러시아의 무시무시한 장군 앞으로 끌어들입니다. 시베리아의 冬장군. 백만 프랑스군은 참패했고 5만이 겨우 살아서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프로이센의 75세 비스마르크
독일의 통일은 철과 피로만 이룰 수 있다는 철혈정책으로 잘 알려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에 의해 수상에 임명되었습니다. 독일 통일의 디자이너로 등장한 비스마르크 이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어서 강대국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한 후, 1871년 1월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는 황제로 즉위하여 독일제국을 선포합니다. 그것도 독일이 아닌 프랑스의 심장 베르사유 궁전에서 말입니다. 당시 유럽의 상황은 식민지 경쟁으로 첨예한 대립상황 속에 있었지만 비스마르크는 큰 그림을 그리며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기보다는 신생국가 독일제국의 안정이 우선임을 강조합니다. 29세에 즉위한 새로운 황제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고 해외 식민지를 얻기 위해 해군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주변국가들을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힘의 균형이 영국-프랑스-러시아 세력과 독일-오스트리아 세력으로 양분되어 팽팽하게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암살이 도화선이 되어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전사자 1,000만 명이 발생하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