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청령포 방문 단상
고향에서 형제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6월 10일부터 3박 4일간의 정기 모임이었습니다. 형제자매들의 개인사정들이 각기 달라서 모두 모일 날짜를 정하기가 어렵지만 막내인 제가 퇴직한 지 4년이나 되었으니 모임 날짜가 주말이 아니라 평일이어도 대부분의 형제들이 괜찮아하십니다. 더블 띠동갑인 맏이와 막내의 나이 터울이 24년입니다. 앞은 툭 트이고 뒤에는 멋진 미술관이나 대학교본부건물 같은 건축물이 우뚝한 곳, 10미터쯤의 폭이 되고 50쯤의 층계를 가진 계단에서 열 형제가 순서대로 자기가 거느린 아들 딸 그리고 손주들을 옆에 세우고 서서 사진을 찍는다면 의미가 있는 멋진 사진이 될 것입니다.
열 형제자매 중 막내인 저와 저의 식솔들이 서있을 계단의 층이 맨 아래일 수도 있고 맨 위일 수도 있지만 사진의 원근법 구도상 멋진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떠오르는 적당한 곳은 프랑스 파리 외곽의 몽마르트르 언덕 같은 곳입니다. 뒤로는 하얀색의 샤크레쾨르 대성당이 서있고 그 앞에는 잔다르크와 성루이왕의 청동기마상이 서있는 계단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은은 그윽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다면 참 멋질 것 같습니다. 상상이기에는 공상에 가깝고 공상이기에는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지만 돈 드는 일없이 쌓는 사상누각이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계단을 가진 곳이 없지 않겠지만 아직은 알지 못합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돌아가시고 나니 이제는 직계가 아니라 방계혈족인 형제자매들이 모이게 되는 셈입니다. 또 다른 방계 혈족인 조카들은 현직에서 한창 열심히 일할 나이인지라 더구나 주말이 아닌 평일이어서 참석을 거의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몽마르트르 언덕 같은 곳에서의 사진 촬영은 말 그대로 상상 속의 사진 촬영일 뿐입니다.
형제 모임 3일 차에는 당일 소풍을 떠났습니다. 막내인 제가 가장 어린 66세 행동대장입니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형제들의 노래시간 주도를 해야 하고 당일 소풍 코스를 짜고 가이드 역할도 해야 하니 활약 점수가 자가 채점으로 100점 만점입니다. 이번 당일여행지는 강원도 영월이었습니다. 며칠 전 영월을 다녀온 친구의 자신만만한 추천이 있었고 또 고향에서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이니 딱 좋은 곳이었습니다. 단종유배지 청령포 - 젊은 달 Y파크 - 정선 정암사 - 함백산 만항재 야생화 쉼터. 9시에 떠나면 밤 9시 이전에 돌아올 수 있는 일정입니다. 90세의 맏형님께서도 이 정도쯤이야하고 자신감을 보이시니 만사오케이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청령포는 영월군 남면의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이 굽이쳐 흐르는 곳입니다. 조선왕조의 태정태세문단세. 조카인 소년왕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이 1457년 조카를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이곳 청령포에 유배시켰습니다. 남쪽은 기암절벽으로 막혀있고 삼면은 서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어서 배가 없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곳. 유배지로서는 최적이었습니다. 학창 시절 역사시간 그리고 역사드라마를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는 단종애사(端宗哀史, 단종의 슬픈 역사이야기) 이건만, 함께 간 노인들께서는 감정이 격해졌습니다. 특히 '할머니'들은 분노에 가까운 흥분상태가 되었습니다. 단종 임금은 지금이라면 초등학교 5학년 나이에 왕이 되었다가 3년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고 2년 후에 왕자의 신분인 군(君),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길을 떠났습니다. 할머니들의 격한 감정은 어린 나이에 당한 비극에 대한 여성특유의 모성애의 발로일 것입니다. 단종에게 수양숙부였던 세조는 천하의 악당이 되었습니다. 숙부가 조카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왕의 자리를 빼앗고 유배를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사약까지 내려서 죽게 하다니... 속리산 세조길을 절대 가지 않을 거야. 엄마와 아들보다는 할머니와 손자의 나이차가 훨씬 커서 어린 왕이 더욱 어리게 느껴져서 훨씬 더 강한 모성애가 분노로 표출됐을 수도 있습니다. 기쁨보다는 분노와 슬픔의 격한 감정은 발동도 빠르고 강한 전염성을 갖습니다.
유배길을 떠나면서 한양 청계천에서 헤어진 후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한 왕비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한양 쪽을 바라보려고 올랐다는 노산대. 숨찬 가슴으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나서 기암절벽 아래로 굽이치는 서강을 보면서 청령포가 섬 아닌 섬이라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물로 가두고 절벽으로 막아버린 유배지에 갇혔던 어린 왕에 대한 애절함이 등을 통해 서늘한 기운으로 노산대 바위로 흘러들어 가는 듯했습니다.
어린 왕이 당한 억울함을 두고서 갈대밭의 숨어 우는 바람 같은 영혼들이 많았습니다. 사육신이나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처럼 대놓고 형 세조의 횡포를 성토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유배지에 사약을 들고 갔던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가 전해져 내려와 후세인들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발길 예놋다
방계 혈족 중 가장 가까운 사이는 2촌 관계인 형제자매이고 다음으로 가까운 사이는 백숙부와 조카의 3촌 관계입니다. 우리나라 민법은 방계혈족을 '동일한 조상을 공유하면서 8촌 이내'인 경우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법률적으로 8촌 이내의 방계 혈족과는 혼인을 금하고 있습니다. 8촌 이내 방계혈족과는 혼인을 할 수 없으며 어길 경우 혼인 무효사유가 됩니다. 근친결혼으로 인한 유전적 질환 발생 가능성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지능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여러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합니다. 사촌 간에도 결혼을 하는 다른 나라를 생각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지능이 높은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벗어난 듯하지만 생물학적 유전에 있어서 가까운 사이일수록 충돌현상도 강하게 일어납니다. 산소(O)와 수소(H)는 불이 잘 붙는 가연성을 갖고 있지만 합치면 물(H2O)이 되어 불을 끄는 전혀 다른 물질이 되듯이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8촌 이내 방계혈족 간에는 혼인을 할 수는 없지만 혼인 이외의 일에 있어서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친족 간 유대관계가 좋은 곳이 우리나라였습니다. 집안 대소사를 통해 가족과 가문의 정체성을 늘 자신과 동일시해 왔고 백숙부가 조카가 장성하도록 뒷바라지를 하는 등으로 지원을 했고, 조카는 백숙부를 부모와 대등한 정도로 까지 예를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방계혈족 중 가장 가까운 핏줄인 숙질간의 3촌 간 혈족관계도 세상사 앞에서 무참히 무너져버리기도 합니다. 가장 흔한 것이 재산과 권력다툼입니다. 역사상 동서를 막론하고 일어났던 왕위찬탈의 역사와 유산다툼과 기업 경영권으로 인한 재벌가의 서먹한 숙질간의 관계가 드물지 않은 일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핏줄이어도 나와 나의 관계만큼 가까울 수는 없습니다. 나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없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이기심입니다. 재산도 2촌이나 3 촌보다 더 가까운 나에게 더 많이 주고 싶고, 권력도 2촌, 3 촌보다 내가 차지하고 싶은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고대역사의 백제의 진사왕은 형인 선왕 침류왕이 죽자 어린 조카 아신에게서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역사학자 중에는 침류왕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은 것을 두고서 동생이 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영국의 장미전쟁은 귀족 가문인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대립하였던 전쟁입니다. 요크가문의 에드워드 5세는 단종처럼 12세의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올랐다가 단종처럼 숙부에 의해 런던탑에 갇혔다가 나중에 단종처럼 죽임을 당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작품 <햄릿>의 주인공 햄릿의 숙부 글로디어스는 햄릿 왕자의 아버지인 선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고 햄릿의 어머니 거투르드는 시동생인 글로디어스 왕과 재혼을 했습니다. 우유부단한 성격의 햄릿은 숙부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을 알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느냐 아니면 모른 척하고 자신이 목숨을 부지하느냐를 고민하면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라고 독백합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등등. 누구나 공감하게 되는 속담은 세상살이에서 누구나 겪게 되는 경험의 일반화입니다. 숙부와 조카 사이의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의 관계도 동서고금의 숙질간의 관계에 대한 일반화이며 셰익스피어가 이를 바탕으로 비극 작품 <햄릿>을 지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금세기 들어 세계적으로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젊은 부부의 수도 줄고 그런 가운데 무남독녀 무녀독남인 자녀가 많으니, 방계 혈족이 없는 사람의 수도 많아지고 또 방계혈족 간에 있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일들, 음과 양의 일들을 겪을 일이 줄어들게 되니 그만큼 삶이 다채롭지 못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이 세습이 아니므로 큰 걱정거리가 아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은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 집안은 문제가 될 만큼의 재산은 있지 아니하므로 이 또한 걱정이 없습니다. 형제간의 다툼, 숙질간의 다툼이 벌어지더라도 받을 유산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가치관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어진 젊은달와이파크-정암사-함백산 만항재의 야생화 쉼터로의 소풍을 잘 마쳤습니다. 종일 좁은 차 안에 앉아서 먼 거리 이동을 하고, 2만 보 이상의 걸음을 걸었습니다만 모두들 무사하게 완주를 해냈습니다. 특히 만항재 야생화쉼터의 쭉쭉 뻗은 낙엽송 숲과 그 아래 자라는 각종 야생화초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각양 야생화를 감상할 시기를 놓친 것 같았습니다만 초록의 기운이 흠씬하여 아쉬울 게 없었습니다.
다시 찾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숲 사진 몇 장으로 뮤직영상을 만들어 함께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