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지인 두 사람이 제가 농사를 짓는 밭으로 고기와 수박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아직 어설퍼서 초대하기 남사스럽다고 했더니 "이 나이에 농사 일 하는 것을 남에게 자랑할 마음으로 하는 모양이네."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면 있는 대로 하면 된다며 장마철 일기예보를 보고는 비가 오지 않는 날로 일방적으로 날짜와 시간을 정하더니, 됐지? 하며 일주일 뒤 진짜로 와버린 것입니다.
고기를 가지고 온 뜻은 '배부른 숯불구이'일 것입니다. 집에서는 고깃불을 피울 수 없으니까요. 숯불구이 식당이 있긴 하지만 푸른 하늘 아래에서 맑은 공기 마시며 불 피우는 원시의 맛, 고기 뒤집으며 굽는 손맛과 지글거리는 소리를 듣는 귀맛. 무엇보다도 숯불에 떨어진 고기 기름이 내는 시뻘건 불길에 구워진 불맛 머금은 고기.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맛입니다. 비싼 물가에 배불리 먹기에는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우리 밭에는 하루에 한 번씩 밤낮으로 찾아오는 들고양이가 있습니다. 땅 파서 묻어 놓은 음식물 찌꺼기도 잘 찾아내어 먹습니다. 덩치로 보아 1년 정도 된 검은 고양이인데 제법 귀엽게 생긴 놈입니다. 사람에게 오십 미터 이내 접근을 안 할 정도로 경계심이 강한 녀석이 오늘은 찐한 고기 냄새 유혹을 떨치지 못해 근접거리 십 미터까지 다가왔습니다. 멀리서는 까만색으로 보이더니 가까이서 보니 까만색이 아니라 에스프레쏘 커피색깔에 흰 발을 가진 아이돌급 커피캣 coffeecat입니다.
며칠 전 풀베기 작업을 하다가 땀을 식히려고 그늘막 아래에 앉아 쉬는데 참개구리 한 마리가 의자 밑으로 다급하게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개구리가 사람 쪽으로 뛰어드는 건 드문 일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개구리 뒤로 오십 센티미터 길이의 뱀이 개구리를 쫓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풀숲으로 숨어 들어가는 걸 목격했습니다. 사람이 앉아 있는 걸 알게 된 뱀이 도망을 간 겁니다. 개구리는 죽느냐 사느냐의 상황으로 화급했고 뱀은 맛난 먹이를 즐기기 직전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잡혀 죽느니 차라리 배고픈 목숨 쪽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길 건넛집에서는 가끔 나타나는 뱀 때문에 기겁하여 고양이를 한 마리 길렀는데 이후로는 뱀을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양이를 보는 순간 나도 급하게 계산에 들어갔습니다. 주거부정에 삼시세끼 보장이 없는 절박한 요놈을 꼬여, 동거를 하면서 숙식제공의 대가로 뱀을 퇴치해 달라는 딜을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사람을 대상으로 이런 음모를 꾸미면 불법강제노역 강요에 해당하는 중범죄를 저지르는 행위이겠지만 상대는 동물이고 4대 보험에 준하는 대우로 계약을 맺자는 것이니 최고의 대우입니다. 오늘 맛 보여 줄 숯불구이 고기 맛이 계약의 미끼 역할을 제대로 해낼 것 같았습니다.
고기 냄새에 취해 코를 발름대며 긴장의 자세를 풀지 못한 채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는 놈에게 고기 한 점을 툭 던져 주었습니다. 작은 동작이지만 고양이의 몸동작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목이 앞으로 쭈욱 빠지더니 몸을 한껏 더 낮췄습니다. 그 자세로 기듯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그 모습. 야생동물 TV영상물에서 보던 고양잇과 동물들의 먹잇감을 덮치기 직전의 바로 그 모습. 영락없었습니다. 이 순간 나는 뱀이었고 고양이는 에덴동산의 이브였습니다. 한 점 고기를 향한 이브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우아했습니다. 고양이의 발걸음을 안개에 비유한 Elliot은 노벨상 수상 시인다웠습니다. 고양이의 발걸음은 소리 없이 나타나 모든 걸 삼켜버렸다가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리는 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한 점 한 점 더 사람 가까이로 던져지는 유혹. 두려우면서도 난생처음 맛보는 고기를 포기하지 못하여 내딛는 고양이의 한 발 한 발. 드디어 나와 고양이 사이가 7미터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산과 들에서 뱀과 쥐를 잡으며 거침없이 살던 들짐승이 불로 구운 인간세상의 음식문화를 접하게 되니 황홀한가 봅니다.
고양이의 이름을 지어야 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나와 고양이 사이에 얼마나 큰 교집합이 만들어질까~하는 기대감에서 생긴 마음입니다. 철수와 영희, Jack and Jill에 해당하는 숱한 고양이들의 이름 '나비'보다는 좀 더 근사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 졌습니다. 함께 고양이를 지켜본 사람들의 합작 이름은 '깜이'였습니다. 네 발과 턱 밑의 흰털이 짙은 갈색 털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까만색으로 보이는 녀석에게 깜이는 까만 고양이의 줄임말이기도 하고 어감도 그다지 나쁘지 않습니다. 식상한 '(검은 고양이) 네로'보다는 더 좋습니다. 고기를 던져 줄 때마다 깜이~ 깜이~하고 불러주었습니다. 이름에 대한 각인효과를 노려서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신이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난 뒤 마지막에 사람을 만들고 사람에게 만물에 이름을 지어 줄 권한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상위의 존재가 지어주는 것이므로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 대상을 다스릴 권리와 보살펴야 할 의무를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지어준 깜이라는 이름을 녀석이 인정할 때 나와 깜이와의 관계는 제대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고양이에게 어물전을 맡긴 격'이라는 속담이 생각났습니다. 곡식 많은 '방앗간을 참새가 지나치랴'라는 속담으로 봐서 고양이가 생선을 좋아할 게 틀림없습니다. 깜이야~ 부를 때마다 큰 마른 멸치도 한 마리씩 주었습니다. 내일도 찾아오게 하려는 속셈입니다.
오늘의 진도는 여기까지가 적당할 것 같았습니다. 내가 자기를 해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하는 정도면 됩니다. 외국으로 이민을 가도 받는 문화충격이 상당한데 이 순간의 고양이가 받는 문화충격은 외계인과 조우하게 된 지구인이 받는 충격 이상일 것입니다. 더 이상의 진도를 욕심내다가 고양이의 경계심을 유발하거나 나의 속셈이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다음 날 토마토 곁순을 따내고 웃자란 새 가지들을 지지대에 묶어서 고정하는 작업을 하다가 깜이가 주변 어딘가에서 숨어서 내가 깜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깜이를 불렀습니다. 기대에 부응함이 이토록 달달한 맛을 주는 줄 몰랐습니다. 이 달달함을 김춘수 시인의 시를 빌어서 표현한다면 이쯤 될 것 같습니다. '내가 깜이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깜이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깜이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깜이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습니다.' 느낌적인 느낌이겠지만 깜이가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깜(感)이 왔습니다. 오늘도 마른 멸치를 열 다섯 마리나 맛있게 먹고 자동차 밑 그늘에서 한참을 쉬다가 두 시간쯤 지나서 다른 곳으로 나갔습니다. 나가는 도중 일부러 깜이~라고 몇 번이나 불러주었습니다. 그때마다 깜이는 뒤를 돌아봐주었습니다. 됐다 싶어졌습니다.
친해지려면 상대를 깊이 알아두는 게 좋습니다. 견묘지간. 좀체 화합할 수 없는 원수 같은 사이를 말합니다. 반려동물로서 가장 인기 있는 두 종류의 동물 개와 고양이는 똑같이 인간의 사랑을 받지만 같은 듯 매우 다릅니다. 차이를 가장 쉽게 설명하는 방법은 남자와 여자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개는 주로 바깥활동을 하던 남자처럼 사냥, 양치기, 집 지키기 등에 이용되었지만 고양이는 여자처럼 주로 집안에서 쥐와 뱀을 잡고 조용하게 지냅니다. 개는 유목생활을 하는 부족에게는 동물을 지켜주는 고마운 동물이었고, 고양이는 곡식을 갉아먹는 쥐를 잡아주는 농경민족에게 인기있는 동물이었습니다. 사막지역에 사는 맹독을 가진 코브라 뱀도 잘 잡았습니다. 이집트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고양이 머리에 인간의 몸을 가진 바스테드(Bastet)를 신으로 섬기기까지 했습니다. 개는 무덤 근처를 배회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아누비스 (Anubis)라는 신으로 죽음, 장례, 죽은 자의 인도자라는 상징이 되었습니다만, 바스테드는 가정과 출산, 여성, 보호의 여신으로 신성시되었습니다. 고양이가 보여주는 여성적 성향 때문에 이집트인들이 고양이를 형상화하여 여신 바스테트를 만들어냈습니다.
고양이는 도도한 여인을 닮은 점도 있습니다. 인간을 주인으로 섬기는 개와 달리 고양이는 자기가 사람의 주인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고양이는 세상 모두가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도도하여 자기를 사랑해 줄 사람을 자기가 선택합니다. 개는 먹이를 챙겨주어야 하지만 고양이는 먹이만 주면 모든 걸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냅니다. 개와 고양이는 마치 혼자 살아가는데 많은 불편을 겪는 남자노인, 늙어서도 자신의 몸을 돌보고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여자노인에 대한 비유가 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 어느 쪽에 비유되는지는 말하지 안 해도 분명합니다. 얼마 전 혼자 사는 젊은 남성들이 가장 많이 기르는 애완동물이 암고양이라는 통계도 있었다고 하니 개는 수캐, 고양이는 암고양이가 성(性)을 대표하는가 봅니다.
농촌에 상주하는 농부가 아니라 5村2都하는 7할 5푼 정도의 농부인 내가 반려猫로서의 깜이와의 동거를 제대로 할 수 있을 지 아직은 미지수입니다. 고양이는 무리가 아닌 단독생활을 하는가 하면, 야성도 강해서 개처럼 굳이 사람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가끔씩 집을 나가 며칠 만에 돌아오는 고양이의 습성도 단독생활을 하고 야생습성을 하는 고양이의 특성 때문입니다. 혹시 깜이가 다른 어느 집에서 돌봄을 받는 고양이인데 녀석이 일시적으로 집을 나와 돌아다니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을 시대배경으로 하는 영화 <메리크리스마스>에는 전쟁터에서 다른 나라 군대를 오가며 살아가는 한 마리 고양이가 있습니다. 영국군 진지에서의 이름과 독일군 진지에서의 이름이 달랐던 고양이처럼, 다른 이름을 가진 고양이를 내가 깜이라고 이름 짓고 나와 동거할 식구로 만드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일 것입니다. 더 두고 보아야 할 일입니다. 여건이 못 미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깜이와의 동거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섭섭한 마음. 매우 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