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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 <향수>

by 흐르는강물처럼

남녀 간 사랑의 시작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없는 게 아니라 뚜렷하지가 않아서 꼭 찍어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애정이 강할수록 뭔가에 씐 것 같습니다. 눈에는 콩깍지, 가슴에는 불이 붙은 듯 뜨거워집니다. 이걸 표현하기 위해 인연, 점지, 운명, 천상배필이란 단어들이 동원됩니다. 명작 예술품이 만들어지는 데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영화감독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대본을 받아서 읽는 도중에 딱 떠오르는 배우가 있었습니다." 딱 떠오른 그 배우를 찾아가서 "당신이 이 역을 맡아주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배우가 거절을 해서 다른 배우를 캐스팅했고, 나중에 그 영화가 흥행에 크게 성공을 했다는 식의 뒷이야기입니다. 명작품이 만들어지는 데에도 인연이나 운명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조영남 가수가 부른 '모란동백'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마산출신의 향토 음악가가 작사 작곡을 하였는데 조영남 가수가 그 노래를 듣고 매료되어서 작곡가에게 그 노래를 자기에게 부르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을 했습니다. 그 노래를 세상에 널리 알려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로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영남이 부르는 <모란동백> 이야기입니다. 노래를 듣는 이마다 의견은 분분하겠으나 제가 듣기에는 노래가 주인을 제대로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월의 꽃 모란과 겨울꽃 동백꽃이 피었다가 지더라도 다음 해에 또 꽃이 피기를 기다리듯이 낯선 변방을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 아래에서 고요히 잠이 들더라도, 이름 모를 바닷가 모래펄에서 외로이 잠이 들더라도 '나'를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기교 없이 담백하게 불러내는 가수의 가창력이 듣는 이의 객창감을 뒤흔들어 깊은 우수에 잠기게 합니다. 한 곡의 노래에는 딱 어울리는 시와 멜로디가 있고 그 노래를 불러내기에 딱 맞는 가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노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려 합니다.

작사와 작곡 그리고 가창, 삼박자가 천상배필처럼 들어맞아 국민가요처럼 사랑받고 있는 <향수>입니다. 또 하나는 <고향>입니다. 두 노래의 가사가 되는 시를 지은이는 시인 정지용입니다. 연작(連作)은 아니지만 두 시 모두 고향을 주제로 삼고 있으니 이야기를 이어보려 합니다. 먼저 시인의 삶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문학작품도 문학가의 삶에서 잉태한 것 아니겠습니까. 1902년 충청북도 옥천 읍내면(지금의 옥천군 옥천읍)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난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同志社) 영문과를 졸업했습니다. 도시샤대학은 1875년에 설립되었으며 현재 일본에서는 와세다 대학교, 게이오 대학교와 더불어 일본의 3대 사립대학으로 꼽히고 있다고 합니다. 시인 윤동주도 도샤시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으니 정지용에게는 시기는 다르지만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서 공부한 후배인 셈입니다.


향 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의 <향수>는 일본에서 대학 재학 중에 고향 옥천의 들판을 그리워하며 지은 초기작에 해당하는 시입니다. 외국 생활을 하면 누구나 김치와 된장국이 먹고 싶듯이, 시인은 우리나라 토속어가 몹시 그리웠나 봅니다. 지줄대는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 질화로, 짚베개, 함추름, 석근 별, 서리 까마귀,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고향 산하를 수채화 그리듯이 그냥 눈에, 귀에, 손에 잡힐 듯한 시어(詩語)를 쓴 걸 보면 짙은 향수병에 걸렸던 게 분명합니다. 나이는 어렸고 더구나 지배국인 일본으로 건너간 식민지 '조센진'이었으니 그 설움도 컸을 것입니다. 시인의 향수는 식민지 청년이 갖는 개인적 비애를 넘어 조선민족 정체성의 근원을 더듬는 심리적 고향에 대한 향수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이야 비행기를 타고 반나절이면 지구 반대편으로 갈 수 있는 시대이지만 그때는 이웃나라 일본으로 오가는 데도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열흘, 보름을 가야 하는 먼 땅이었습니다. 대학 졸업까지는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고향이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건너갔으면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비비댈 온기라도 있었겠지만 혈혈단신이었으니 향수가 짙어 어찌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가(야)' 있었겠습니까. 어려움 속에서 탄생한 <향수>는 고향이라는 보편성에다가 사무치게 짙은 정서를 부여한 명작 시가 되었습니다.


시작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정지용은 청록파 시인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그리고 윤동주와 이상을 추천하여 등단시키기도 했을 정도로 한국 시단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그의 문학적 재능과 영향력을 알아본 일본이 태평양전쟁 찬양 시를 쓸 것을 강요하기도 하였습니다. 지조가 굳은 정지용은 <이토>라는 제목의 전쟁 찬양 시인지 아닌지 모를 모호한 시를 써 주고는 해방이 될 때까지 사실상 붓을 꺾어버렸습니다. 조선의 수많은 문학가들이 친일행적을 보인 것에 비하면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45년 해방 후 좌파 문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과위원장을 맡았으나 시작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46년 우익 진영의 젊은 문학가들이 결성한 조선청년문학가협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정치적 좌우대립이 극렬해지면서 월북을 선택한 문인들이 있었으나 정지용은 전향을 선택하여 전향한 지식인들의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였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고 피난을 하지 못한 정지용은 북으로 가던 중 동두천시 소요산 근처에서 폭격으로 48세를 일기로 사망한 것을 추정되고 있습니다. 월북인지 납북인지 불분명하게 남은 사실입니다.


서슬 푸른 제5공화국 군사정권기에 친북 성향의 좌익 문학인으로 지목되어 정지용의 모든 작품은 출간금지를 당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등장하게 될 무렵 그의 작품들도 해금되어 그의 시 <향수>와 <고향>이 대중들에게 뒤늦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시인협회장이었던 이근배는 "정지용 시인 자체가 그냥 한국 시문학사라고 할 만큼 정지용 시인이 끼진 우리 한국 시사 특히 현대시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정지용을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살았노라고 고백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정지용과 그의 시들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자 폐쇄되었던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찾아가는 길이 다시 열린 셈이었습니다.


시를 읽어 본 가수 이동원은 시가 너무 아름다워서 주저 않고 서울대학교 성악과 교수였던 테너 박인수를 찾아갔습니다. "작곡가 김희갑선생을 찾아가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요청을 할 건데 곡이 나오면 자기와 같이 듀엣으로 노래를 불러줄 수 있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시를 잘 알지 못했던 박인수였지만 시를 보고 나서는 이 시는 서울 토박이인 자신에게도 고향을 만들어주는 시라고 여겼습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이동원이 박교수를 찾아가서 같이 노래하겠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나 김희갑을 찾아가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나 모두가 신의 한 수였습니다.(가수 조영남과 테너 박인수의 대화내용)


작곡 요청 후 1년여의 시간의 흐른 뒤 노래가 만들어졌습니다. 원본 그대로 노래를 만드려니 굉장히 힘들어서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희갑선생의 부인은 작사가로 유명한 양인자선생이십니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김국환의 <타타타>, 혜은이의 <열정>, 남진의 <나야 나>,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 등의 노래들의 가사가 그의 작품입니다. <향수> 작곡하는 일을 두고서 작곡가 남편과 작사가 아내가 서로에게 많은 조언을 해가며 그렇게 명곡이 탄생했으리라 짐작합니다.


1989년 <향수>는 이동원의 여섯 번째 앨범 <향수-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표제곡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시인의 원고지에서 탄생한 시와 작곡가의 음표가 오선지 위에서 만나 옥천 들판에서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황소'로 느적대고, '전설 바다의 밤물결'같이 출렁이며, '초라한 지붕 위로 날아가는 서리 까마귀'처럼 우지짖으며 명곡이 탄생했습니다. 구체적 시의 정서를 음악의 추상성으로 승화시킨 이곡은 시인과 작곡가의 절묘한 만남의 장이었습니다. 시기적으로 시인과 작곡가가 함께 만난 적이 없었으니 노래에서 괜스레 더욱 짙은 향수를 느끼게 됩니다. 황진이의 한시(漢詩) <상사몽(相思夢)>의 애틋한 그리움 같은 것이 더해지는 듯합니다.


작시 황진이

번역 김안서


꿈 길 밖에 길이 없어 꿈 길로 가니

그 임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향수>는 시인이 그려놓은 무채색 스케치에다가 작곡가가 색을 입혀 시각 청각 촉각을 자극하는 한 편의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대중 가수와 성악가의 동시대비와 연속대비를 통한 음색이 더하여져 살아 움직이는 영상으로 화려하게 태어났습니다. 고향 옥천을 그리며 적은 정지용 시인의 개인적인 시가 세월을 지나면서 음악가를 만나 노래가 되고 가수가 불러 가창이 되면서 한국인들을 집단적으로 유년 시절로 회귀시키고 그곳에서 민족적 정체성의 낙인을 찍어 주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시인 정지용, 작곡가 김희갑, 가수 이동원, 성악가 박인수. 이제 작곡가 김희갑선생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수없이 들어는 보았을 터이지만 단 한번도 불러 본 적이 없을 이 노래, 앞으로도 수없이 들을 이 노래. 한 번은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민족적 정체성의 낙인을 찍으시기 바랍니다. '향수'라는 단어에 뭉클해지는 한국인이시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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