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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Apr 13. 2024

불량품들의 사계

스텝이 꼬여도 너는 왔다 89

스텝이 꼬여도 너는 왔다   



                    

왔구나. 연두색이 산 능선을 따라 엎어지고 뒤집어지면서. 요리조리 자갈 틈 사이로 새싹이 올라오고 있다. 봄, 너는 스텝이 꼬여도 쉼 없이 왔다. 고양이가 지붕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다.   

   

계곡 건너에서 아줌마들이 챙이 큰 모자를 쓰고 냉이를 캐고 있다. 그들은 어린 쑥과 냉이를 가위로 자르고 칼로 캔다. 냉이는 호미로 캐야 쉽다. 나도 칼로 캐다가 여기 이사 와서야 그걸 알았다.

“서울서 온 것들이 냉이와 민들레 씨를 다 말려 버린다니까.”

동네 주민들이 투덜거리며 지나갔다. 나도 서울 살 때 쑥을 캐러 다니면서 시골 사람들이 벌침같이 쏘아붙이는 날 선 텃새를 귀 뒤로 흘려버리곤 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도 바구니를 들고나가 삐비를 뽑아먹고 벼룩이자리 나물과 진달래꽃을 바구니 가득 채워왔다. 엄마는 새싹 보리와 벼룩이자리를 넣고 홍어 애국을 끓였다. 진달래는 술을 담갔다. 나는 아버지 몰래 진달래주를 한잔씩 마시곤 했다. 엄마는 혼을 내면서도 심하게 말리진 않았다. 진달래주를 한잔 하고 나면 대낮에 마당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나는 내리쬐는 햇살로 쇳덩이 같은 눈꺼풀을 견디지 못해 토방에서 잠이 들곤 했다. 가끔 그 시절이 생각나 봄밤 평상에서 술 한잔하고 누워 별을 쳐다보곤 한다.    

  

이사 오기 전 봄이 되면 강아지 산이를 데리고 이곳에 왔었다. 밭과 언덕에서 쑥과 냉이를 캤다.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냉이와 쑥을 뜯다 보면 비닐봉지에 봄나물이 꽉 찬다. 집으로 오다가 친구들에게 나누어줬다. 국을 끓여 카페 손님들에게 내놓기도 했다. “세상에 카페에서 쑥국이라니” 손님들은 뜻밖의 봄 냄새를 즐겼다.      

봄마다 남한산성에 올라가서 진달래를 따다 손님들 술잔에 띄워주었다. 진달래가 지고 벚꽃이 피면 꽃을 따다 카페 테이블에 깔았다.   

   

나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진달래와 시린 봄빛만은 예외다. 나의 소망은 저 빛을 따라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내가 간절히 가닿고 싶은 곳은 ‘저 건너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은 아릿한 저 빛깔을 닮은 곳이다. 나는 그 봄빛을 손바닥에 가득 올려놓고 봄 앓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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