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량품들의 사계 Apr 19. 2024

불량품들의 사계

쉽싸리와 쓉싸리 92

쉽싸리쓉싸리



            

수돗가에서 손을 씻던 성길 씨가 집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다정하게 불러 세웠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인다. 소주를 마셔 그런가 싶기도 하고.     

“여어기요! 전기세하고 수도세 계산할래요?”

“아니요.”

“계산할 줄 알면 월세에서 이만 원 제해줄게요.”

아! 이만 원, 나는 흔들렸다.

“왜 여동생이 못한다고 헙디까?”

하남 시내에 사는 여동생이 말쯤에 전기세를 계산해 주러 온다. 여동생과 싸우면 여동생이 전기세 계산 안 한다고 한다.

“동생들한테 끌려다니기 싫어서요.”

“그럼 배워서 해 보께요. 암 껏도 아닐 텐데”

“못하겠으면 며칠 있다가 말하세요.”

“근디 사장님은 왜 안 허요?”

“뒷방 할머니 방에 들어가는 것도 그렇고.”

성길씨는 관공서, 은행일 같은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뒷방 할매 핑계를 댄 것이다.


그렇게 월세 이만 원 깎아 달라 해도 “안 돼요” 하더니 무슨 마음이 내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놈의 이만 원 제 해 준다는 말에 힘이 솟았다. 그 여세를 몰아붙였다. 막사 옆 나머지 땅도 삽으로 파나 갔다. 까짓것 누워서 자기보다 쉬웠다. ‘밭일도 맘먹기 달렸구나’ 혼자 콧노래를 불렀다.


하필 이때 풀치가 멀쩡한 눈으로 나타났다. 풀치는 수돗가에서 물 묻은 손을 바지에 닦고 있는 성길씨를 불렀다.

“혀엉, 뭐 하는 거예요?”

“왜?”

“누님 삽 들게 하고.”

성길씨는 라이터를 꺼내며 나를 보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에라 잘됐다’ 싶은 풀치는 나를 도와줄 맘에 신이 났다. 마당으로 내려왔다. ‘눈 깜짝할 새’보다 빨랐다. 단숨에 밭으로 밭에 들여놓았다. 풀치는 내 손과 삽을 동시에 잡았다.

“누님! 삽 이리 줘요.”

풀치는 머뭇거림이 전혀 없었다. 나는 손을 빼면서 말했다.

“니 갈 길 가세요.”

나는 성길씨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나랑 풀치랑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삽질은 좀 하지요.”

“아따, 삽질 좋아허네. 술 먹고 빙하는 것? 얼른 갈 길 가세요.”

나는 성길씨 들으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풀치는 입을 다문 채 마당으로 발을 내디뎠다. 풀치는 섭섭했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갔다. 그의 발걸음은 빨랐다. 그렇다고 일일이 설명할 수 없고. 참말로 둘 사이에서 줄타기 어렵네.     

막사 옆에는 ‘쉽싸리’가 자란다. 오해 말라. 꼭 욕 같지만, 식물 이름이다. 얼마나 강인한지 뿌리를 파내도 실뿌리 하나만 살아있으면 주변을 금방 다 공략해 버린다.

삽으로 룰루랄라 싹 파버렸다. 쉽싸리 뿌리는 누에같이 생겼다.

‘근디 어쩌 도라지 같이 생긴 것이 이리도 많냐.’

삽에 싹둑 잘려 반 토막 된 쉽싸리 뿌리를 거름이나 되라고 땅에 그대로 두었다. 웬일, 이 뿌리가 일이 될 줄이야.     


여우비가 오다 그쳤다. 성길 씨가 상추 모종에 물 조리개로 물을 주고 있다. 점심을 먹다 말고 창문을 열었다.

“비 왔는디 물 줘요?”

대답이 없다. 오늘은 왠지 서울말을 쓰고 싶었다. 억양을 낮추고 코에 힘을 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사아자앙님, 나도 물 줘야 돼요?”

“마아악사 여옆 파아지 마알라니이까 왜에 파아서 머얼쩌엉하안 도오라아지를 다 파아버어려쏘”

성길씨는 화가 잔뜩 나 말을 더듬거렸다.

“쓉싸리? 그게 도라지였다고라이?”

나는 그의 말투에 당황해 쉽싸리가 쓉싸리 된 발음으로 나와버렸다. 그에게 욕처럼 들렸으면 어떡하지. 어쨌든 사투리와 섞여 짬뽕이 돼버렸다.  

“내에가 저언에 마알해엤잖아아요. 거어기는 파아지 마알라고.”

“그래서 어떡했어요?”

“따앙속에 다아시 무더었지 어어쩌기인 머얼 어어째요.”

그의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불구하고 남색과 보라색이 도라지꽃이 머릿속에서 활짝 피었다가 졌다. 생각해 보니 샛길로 비스듬히 뻗은 도라지 줄기를 막사 쪽으로 세워놓고 길을 지나갔었다. 힘이 남아돈다고 오두방정을 떨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데. 내 머리통을 두 대 쥐어박았다. 난 아직 여전히 초보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 오래간만에 성길 씨와 사이 좋았는디’ 성길 씨한테 거기 파지 말라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기억했으면 팔일이 없었다. 어쨌든 파버렸으니 마당에 침묵이 고였다. ‘며칠 가겄구나’ 내가 잘못했으니 당분간 깨갱 하고 있어야겠다. 괜한 풀치 맘만 상하게 하고. 이래저래 나는 쓉싸리 돼 버렸다.

마당에 나가는 타이밍도 놓치고 ‘에라 모르겄다. 어쭈고 되겄지’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상추 모종이나 가져다 심어요” 성길 씨가 남은 상추모종판을 내 밭에 툭 던져놓았다.

‘뭐야 그럼 한랭전선은 걷어치우는 거여’ 고골 전선 상추밭 이상 없음이다.     


성질 급한 성길씨가 월세 이만 원 제 해 준다고 말한 이유가 있었다. 여동생에 전기세 계산 해주면 이만 원을 줬었다고 술 마시고 나에게 말했다. 전기세 계산은 동생과 화해해서 다시 하기로 했다. 에이 좋다 말았다.     

진달래꽃망울이 돌아선 내 어깨높이까지 다가왔다.



작가의 이전글 불량품들의 사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