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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Oct 31. 2023

카모플라쥬

주제 카모플라쥬

위장크림을 서로의 얼굴에 문대주며 낄낄거리는 동기들. 얼굴에 선크림 말고는 무언가 이렇게 덕지덕지 발라본 기억이 없어서 그저 재밌기만 했다. 건장한 청년들이 모여 동심으로 돌아간 듯이 색칠놀이를 하고 있었다. 도화지 대신 상대의 얼굴인 것만 빼면 같은 감정이었다. 잔뜩 칠해진 국방색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분장이 과연 실전에서 효과가 있을까? 어차피 내가 전쟁에 나서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랴 싶어 망상은 금방 거둬들였다. 내가 해온 위장에 비하면 이런 것은 너무나 하찮다고 느끼면서.


자연을 이루는 수많은 동물 식물 곤충들이 취하는 행위가 있다. 존재하는 한 가장 최우선으로 이뤄져야 할 목표로 DNA에 각인되어있는 '생존'을 지키기 위해 생명들은 각자의 상황에 맞춰 여러 방식들을 완성시켜 왔다. 포식자로서의 위치를 고수하며 생존의 위협을 없애오는 방식도 있고, 자신의 약함을 대신하기 위해 다른 것에 기생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바람에 실려 어디든지 퍼져 날아가는 씨앗들도 있으며, 아무리 척박한 환경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남도록 변한 것들도 있다. 각각의 생존을 위한 여러 방식들, 그중 내 관심을 끌어당긴 것은 '위장'이다.


자신의 몸이 닿은 곳에 맞춰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 어렸을 때 처음 봤던 그 변화는 참 신기했다. 색의 변화라는 노골적인 방식이 어린이의 눈에 유달리 흥미로웠던 것도 납득이 간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의미를 떠올리기엔 아직은 어렸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같은 나뭇가지로 변해버린 자벌레의 모습이나, 새의 눈을 박아 넣은 나비의 날개, 모래 사이에 온몸을 파묻고 먹이를 기다리는 개미귀신, 나방의 시체 곰팡이를 뒤집어쓴 나무늘보들. 새롭게 알게 된 그들의 방식은 참 흥미로웠다. 다양해진 방법들이지만 결국은 생존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위장도 결국은 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나의 위장을 거둬들이고 모습을 드러내도 죽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정글에 사는 것도 아니고, 문명이 없 야만인들의 시대에 살고 있는것도 아니다. 아마 심하면 손가락질 정도와 멀리서 외친 욕 몇 마디 듣는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정도의 것들은 아무렇지 않을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내 위장을 벗어낼 생각은 없다. 아주 얕은 생채기여도 굳이 따끔함을 감수하고 드러낼 필요가 없기 때문에. 혹시 모르지 않나, 그 생채기가 바이러스를 불러와 종국에 나를 눈 감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과한 품이 드는 일도 아니기에, 계속 이렇게 의태한 모양새로 유지하는 것이 차라리 편하기도 하다.


나는 의태 중 하나로 우울을 자주 찾는다. 실없는 기쁨을 걸러주며 공허를 막아준다. 감정의 요동에게서 나를 숨기기에 가장 편리하고 간단한 방식이다. 누군가의 달콤한 사과 한 알이 나의 인생을 망가뜨리진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최소한의 변화보다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이 더욱 안전하다. 많은 것을 포기했다고 보일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다면 포기한 적이 없다. 취한 적 없는 이에겐 찾아올 리 없는 우울. 내게 우울이 겨우 '의태'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의 위장은 효과가 대단하다. 완벽하게 숨겨진 나의 모습은 스스로도 못 보고 지나칠 정도로 동화되었다.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쳐다보니 희미하게 형태가 감지되는 것이지, 그런 게 아니라면 평생을 자각할 수 없을 것이다. 생존과 가장 가까운 방식이지만, 그 의미가 조금은 변질돼버린 생존. 내가 취한 방식은 그저 내가 숨을 조금 더 편하게 쉴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것뿐이다. 그것뿐이지만, 그것이라도 있어야 산다. 한발 더 솔직하자면 살기 위함은 아니다. 죽지 않기 위함에 더 가깝다. 사는 이유는 내게 필요치 않다. 안 죽어도 되는 이유만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완벽한 이유를 찾을 때 까진 나의 의태가 정교함을 잃어선 아직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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