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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범 Aug 21. 2023

비틀거리는 당신을 위하여

토마스 빈터베르의 <어나더 라운드>

 

 거나하게 취한채 걷다 길바닥에 고꾸라진다. 눈앞에 뒤집힌 세상이 낯설다. 고주망태가 돼서야 제 몸 하나 가누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를 느낀다. 기어코 기어서 집까진 무사히 들어갔건만. 곧바로 변기를 붙잡고 다 쏟아내고 만다. 토사를 뒤집어쓴 채로 누워 있으면. 왜 어머니가 어린 날 붙들고 밤마다 울분을 토했는지. 그 만취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세상은 결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고 언제나 기대를 무너뜨리는 일투성이니. 지긋한 슬픔을 풀기 위해 거듭 술이나 푼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 다 이해된다. 삼삼오오 마실 때까진 분명 즐겁고 행복했는데, 술은 날 가장 높은 곳까지 끌고 와 단숨에 밑바닥으로 밀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기불능 처방엔 역시 알코올만 한 게 없다.


 그래서 이 남자에게 자꾸 마음이 쓰인다. 중년의 외로움이 더 무섭다 했나. 위스키 한 잔에 그만 눈물이 삐져나온다. 그에게도 한때 생기 넘치던 매력적인 시절이 있었다. 그저 나이만 먹었을 뿐인데 훌륭한 선생님은 어느샌가 지루한 아저씨가 됐고 투명인간 취급까지 받는다. 자신감과 의욕마저 잃어버린 그에게 가족도 직장도 더는 내 편이 아니다. 이를 안쓰럽게 지켜보던 동료 교사는 흥미로운 가설 하나를 제안한다. 인간은 혈중 알코올 농도 0.05% 이상일 때 가장 이상적이라고, 그렇게 취하려고 시작된 인간실험. 의외로 성공적이다. 모든 문제가 정말 술술 풀리기 시작한다. 남처럼 느껴지던 부부관계와 멸시받던 교직 생활도 술잔을 기울일수록 중심을 되찾는다. 드디어 인생의 다음 라운드가 시작된 걸까.


 긍정적인 출발과 달리 모두가 술독에 빠져 엉망진창이 된 다음에야 실험은 끝이난다. 다짐은 왜 항상 무너지고 마는 걸까. 사실 나도 술만 마시면 금세 밑천을 드러낸다. 부끄러운 기억이 많아 냉큼 취해버리고 싶다. 진탕 마셔서 불안을 전부 잊을 속셈으로 술을 따른다. 폭탄주가 목구멍을 타고 혈관으로 쭈욱 퍼져간다. 피부는 붉게 달아오르고, 그 밑으로 나쁜 피가 흐르는 것을 느낀다. 속내를 알 수 없던 이들도 짠 한 번에 찐한 사이가 되는 마술. 하지만 난 매번 정도를 잃고 폭발하고 만다. 고성방가를 지르며 판을 깬다. 동전은 던져졌고, 결과는 관계를 망치거나 회복하거나 둘 중 하나. 노름꾼 마냥 술을 보증 삼아 사고를 치고, 다음 날 심신 미약으로 결백을 주장한다. 항상 끝장을 보는 성격 탓에 어째 간 수치만 높아지는 것 같다. 이런 실수들이 켜켜이 쌓여서 어쩌면 내 간은 아주 시커멀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술을 명분으로 용기를 얻었을 뿐이지 실제로 달라진게 없었다. 오히려 상황만 더 악화시킨 셈이다. 그런데도 홀가분한 기분으로 춤을 춘다.


 비록 중독은 치명적이지만 원래 모든 일에는 위험이 뒤따른다. 잃기 두려워 가만히 있으면 나 자신은 사라져버린다. 도박일지라도 우린 주사위를 굴려야 한다. 그렇게라도 도전해야 한다. 고약한 주사를 통해 가장 싫어하는 것들이 내가 되기도 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무너져 봐야 한다. 깨고 나면 머리가 지끈거리며 후회하겠지만. 세상은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술잔을 부딪치듯 끝끝내 부딪혀 봐야 안다. 그렇게 주량을 알아가듯 나의 한계를 가늠하고, 실패를 삼키며 긍정한 순간 또 다른 삶이 시작된다. 깊게 내뱉은 한숨도 숨이며, 밤새워 마셔도 결국 아침은 밝아온다. 술잔을 쥘 힘이 남아 있다면 마셔라. 리큐어(ReCure)를 위하여. 비틀거리는 당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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