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무언갈 지키기 위해 외면했던 진실이 오히려 소중한 걸 잃게 만들고,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는 걸 그대로 지켜보기만 할 때도 있다.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넘쳐나지만 덧난 마음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 들으려 하지 않고 묻지도 않는다. 아이러니하게 깊은 상처는 치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구조를 바라지 않는다. 가후쿠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연기를 할 수 없게 되고, 뺨에 흉터를 지닌 미사키는 입을 꾹 닫은 채 운전만 하며 살아간다. 그들이 차 안에서 듣는 테이프 속 연극 대사가 절묘하게 각자의 삶을 관통한다. 가후쿠가 서서히 뒷좌석에서 조수석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각자의 사연이 맞물리며 그 거릴 좁혀간다. 그렇다 도무지 매듭을 풀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대화는 언제나 실마리를 찾기 마련이니깐.
이렇게 외로운데 살 수 있을까요? 나에게 인생이란 견딜 수 없음의 지속이었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장난처럼 당겨졌다가 놓쳐지지 않기 위해 벌벌 떨며 살아왔다. 그 끊어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내겐 곧 현실이었다. 다들 시간이 늘어날수록 완성에 가까워진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정반대 같다. 삶은 길면 길어질수록 점점 힘을 잃고 느슨해진다. 기대했던 탄성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고 기어코 끊어지고 만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줄에 매여 사는 꼴이 마치 인형극 같다. 원치 않은 사람들과 하는 연극. 맡은 바 배역을 소화하기에 지루한 일상은 끝없이 반복된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난 아마도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할 거다. 제 역할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난 그저 주어진 몫의 대사만을 말할 수밖에 없겠지.
극 중 가후쿠는 안톤 체호프의 희곡 연출을 맡는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음에도 여러 나라 배우들을 섭외해 연극을 만든다. 소통될 수 없는 비극 속에서 그는 무엇을 기대한 걸까. 흔히들 고통을 겪어야만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한다. 희망을 가지면 비록 지금은 넘어지고 쓰러져도 언젠가 씩씩하게 일어날 거라 믿는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틱한 반전은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대개 삶은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나빠지지 않으면 차라리 다행일지 모른다. 영화 드라이브마이카의 등장인물들 역시 그렇다. 미사키는 끝까지 혼자이며 가후쿠는 트라우마 때문에 아직도 연기가 두렵다. 그들은 여전히 각자의 역할을 버겁게 소화할 뿐이다.
무대 위에서 소냐는 바냐 아저씨를 안으며 수화로 말한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가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결국 인생이란 해소되지 못한 채로 죽음을 맞는 것. 하지만 그 모습이 도리어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 상처를 안아줄 수 있는 이가 있어서가 아닐까. 마치 가후쿠와 미사키가 서로를 마주 보는 순간처럼 말이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린 죽을 때까지 심장의 엔진음을 들으며 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빨간 펌프질은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죽어있다 느껴도 언제나 시동이 걸려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몸과 마음은 액셀과 운전대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핸들을 놓지 않고 페달을 밟아야 한다. 나아가지 않으면 나아지지 않는다. 달리다 보면 터널을 지나도 또 터널이 나오고, 별안간 소나기가 쏟아지기도 한다. 커다란 혼란이 찾아오기도 하고 또 죽을 만큼 비참할 때도 온다. 하지만 그 여정 속에도 분명 진심에 도달하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선 안된다. 영화는 나에게 때 묻은 손을 내밀며 말한다. 쓰레기가 흩날리는 것이 꼭 눈처럼 보이지 않느냐고, 난 살아서 그 손을 꽉 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