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첫 번째 꿈, 승무원
금수저는 아니었지만, 나름 유복하게 컸다. 그 당시에는 영어유치원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외국인과 회화위주의 수업을 하는 곳은
찾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느 대한민국의 학구열 높은 학부모보다 한층 더 열정적이었던 엄마는 어떻게 알고 영어유치원 같은 학원에 나를 등록시켰다.
방학 때면 연수원에서 외국인들과 살았다. 그 당시 같이 지냈던 친구들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소위 대치 키즈였다.
능동적으로 수업에 임하는 학생, 아니 어린이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영어에 노출이 많이 되는 환경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하고 듣는 게
익숙해졌다. 엄마의 열정적인 외국어 사교육은 고등학교시절까지 쭈욱 이어졌고, 덕분에 나의 첫 덕질은 HOT나 GOD가 아닌 Leonardo Dicaprio와
Backstreet Boys였다. 그래서 요즘 지인들이 자녀들을 영어유치원에 보낼지 고민한다고 할 때면 나는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편이다.
흔히들 말하는 주입식 교육의 산물로 자란 나는 진정한 장래희망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채로, 수능을 보게 되었다. 수능 성적에 맞게 가장 좋은 대학교에, 가장 유망한
학과에 진학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친구분들을 만나면 “우리 딸은 변호사가 하고 싶다나,
외교관이 되고 싶다나 하여튼 그래 “라고 하셨지만 나는 관심조차 없었다. 엄마가 하라 그러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했다.
하지만 나는 보기 좋게 입시에 실패했다. 인서울 4년제 대학도 엄마가 실패라면 실패인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토록 가고 싶었던 외고 입시에 실패했을 때보다도
괜찮았다.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외고입시 때와는 달리 대학입시에는 별 욕심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외고에 진학하고 싶었던 이유도 사실은 기숙사생활을 하고 싶어서였다)
엄마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인이 되고 나서 엄마는 모든 경제적 지원을 끊었다. 집에서도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성인이니만큼 당연하다고 여겼기에 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해서 하고 돈을 벌고, 또 쓴다는 데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평판이 괜찮은 대학교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과외 자리가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카페, 쌀국숫집, 방청, 좌담회, 시험지 배분, 출구조사, 연회장, 전단지, 서빙, 편의점, 사무직,
마트 시식 등. 안 해본 알바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대생이 할 수 있는 꽤나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일부러 찾아서 했다.
급여만 생각하면 과외가 가장 쏠쏠했지만 가장 재미있는 건 카페알바였다. 내성적인 성격인데도 카페에서 일할 때는 생글생글 잘 웃고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갈 용기가
생겼다. 마치 외향적인 페르소나가 생긴 것 같았고 그런 내 모습이 낯설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카페 알바 다음으로는 독서실 알바를 좋아했다. 혼자서 일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학교 과제를 할 시간이 확보되었다.
그러다 대학교3학년이 되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고민해 보게 되었다.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엄마가 늘 말씀하시던 변호사, 외교관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재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기만 한 일이란 없는 것 같지만 순수하던 그때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한창 외모를 가꾸고 꾸미는 데에 관심이 많을 나이인 것을 감안하고도 유난히 꾸미는 데에 진심이었던 나는 보이는 것이 중요한 직업이기를 바랐다.
더 욕심을 부른다면, 해외여행 경험은 중학생 때 간 캐나다와 일본이 전부였던 만큼 미국이나 유럽 쪽 해외출장을 자주 갈 수 있는 일이면
금상첨화일 것 같았다. 독서실에서 끊임없이 검색을 하다가, 알고리즘이라는 것도 없던 그때, 드디어 나는 내 꿈의 직업을 찾았다.
항공기 객실 승무원(a.k.a 스튜어디스)! 이거다!
승무원이 되겠다며 제일 먼저 발걸음을 향한 곳은 승무원 아카데미였다. 물론 학원이나 과외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합격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쪽 분야에 대해 아는 바가 말 그대로 전무했던 나는 학원상담부터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2010년에는, 원하는 정보를 원하는 만큼 얻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처럼 몇 번 검색만 하면 알고리즘이 알아서 필요한 정보를 (광고와 곁들여) 턱밑까지 갖다 바쳐주는 시대가 아니었다. 다음이나 네이버 카페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시간이나 노력이 많이 드는 등업 조건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급했다. 아무도 다그치지 않았고 지원 날짜가 임박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도무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진짜 원하는 게 있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만사 세월아 내 월아 여유 넘치고 차분했던 건 내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문을 두드린 승무원 학원에서는 15여 년 전인 그때 당시 150만 원이라는
거금을 제시하며 등록을 유도했다. 150만 원. 당시 편의점 알바 시급은 기껏해야 2800원이었다. 150만 원은 너무나도 큰 금액이었다. 그래서 나는 터벅터벅
학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음날
등록을 했다.
150만 원에는 무제한으로 들을 수 있는 강의와 모의면접, 피드백, 그리고 이미지코칭과 면접복 코디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학교수업과 알바시간, 그리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모든 시간을 학원 또는 학원 앞 던킨도너츠에서 보냈다. 학원에서 나누어준 항공사 면접 질문지에 대한 답변을 작성했다. 혼자 꼬리질문의 꼬리질문까지
해가며 답변 준비를 했다. 모든 답변은 영어로도 준비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재미있어서 그렇게 했다. 집에 오면 거울 앞에 서서 면접복을 입고 승무원헤어를 하고
구두까지 신고 활짝 웃으면서 거울 속 면접관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처음에는 계속해서 활짝 웃고 있자면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하지만 한 달, 아니 이주일도 지나지 않아 경련은 더 이상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밖에서도 활짝 웃고 다니다 보니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흰 피부를 선호한다는 카더라 소식통에, 그 해 여름 워터파크에 놀러 간 것도 후회했다.
그 이후로 내가 하는 모든 생활은 자기소개서에 쓰거나, 면접 답변에 반영할만한 경험이 될 수 있는 것 위주로 돌아갔다. 바른 자세를 위한 요가, 면접날 떨지 않기 위한
명상, 호텔 연회장 아르바이트 등이 그런 것이었다.
문제는 답변의 내용이었다. 그 부분을 학원 강사님들께 도움을 받았다. 대한항공, 아시아나, 카타르, 에미레이트, 에티하드, 싱가포르, 동방항공 등 여러 항공사
승무원출신의 강사님들에 모두 내 답변지를 들이밀며 첨삭을 받았다. 항공사마다 사내 분위기와 지향하는(=원하는 인재상) 바가 달랐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강사실을 들락거리다 보니 학원 선생님들 중에 나를 모르는 분은 없었다.
그중 카타르항공 사무장 출신이셨던 (지금은 너무나 흔하지만 그 당시에 내 눈에는 국위 선양한 위인으로 보였다) 선생님께 첨삭을 받고, 수정할 부분을 보완해서
바로 그날 저녁에 또 선생님의 책상에 다가가 선 날, 선생님이 그랬다.
“와. 너 진짜 니가 원하는 건 반드시 해내야 되는 애구나??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합격할 때까지 “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원하는 건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사람. 지금까지도 내가 들었던 칭찬 중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엄마는 늘 내가 너무 물러터졌다면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엄마친구딸 같은 사람이 되라고 누누이 말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노력한다고 되나. 실내화 한 짝을 훔쳐가면 다른 한 짝도 내어주는 나였다.
그런 나를 선생님이나 스터디 멤버들은 악바리 똑순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자신감에 가득 찬 나는 면접날만을 기다렸고 드디어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