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고등어 초밥
첫 면접을 본 항공사는 대한항공이었다. 키 162cm에 900 이상의 토익성적, 엄마는 질색했지만 다니다 보니 나쁘지 않은 평판의 학벌, 이제는 디폴트 표정이 된
환한 미소와 준비된 답변으로 무장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면접장에 도착하니 나는 외모가 뛰어나지도 항공과 출신도 아닌 땅딸보였다. 용케 실무면접은 합격했지만
임원면접에서 떨어졌다. 나의 생각했던 영어 실력은 “Tell me about yourself"라는 누구나 답변을 준비했을, 영어를 제아무리 잘해봤자 눈에 띄기 어려운 질문으로 묻혔다.
실무면접을 합격했다는 건, 내 이미지가 영 탈락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정신승리를 하며 다음 면접을 준비했다. 그렇게 1년이 넘게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JAL, 사우디아라비아항공, 에미레이트, 알이탈리아, 핀에어, KLM 나중에는 저가항공사인 에어아시아, 에어아라비아, 플라이두바이 등 수도 없이
많은 항공사의 면접을 봤다. 여러 번의 합격통보를 받았지만 그중 최종합격을 준 항공사는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나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면접에 또 떨어졌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나중에는 면접을 보러 간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알바 쉬프트를 바꾸는 것도
하루이틀이었다. 차라리 불합격할 거라면 1차에서 떨어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뒤로 가서 떨어질수록 멘털은 더 오래, 깊게 무너졌다.
면접용 헤어와 메이크업도 샵에 가서 받았지만 15분 남짓을 위해 10만 원씩 쓰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스스로 하기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힘든 건 바로 “과연 언젠가 승무원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었다.
2015년, 프로듀스 101이라는 아이돌 선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당신의 아이돌에 투표하세요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이 프로그램은 101명의 아이돌 지망생 소녀들이 매주 경연을 하면서 국민 프로듀서님들(=시청자)들의
투표로 최종 11명을 발탁하여 데뷔를 시켜준다는 플랫폼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프로듀스 시리즈가 그 이후에 몇 번이나 나온 걸 보면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재능과 미모를 두루 갖춘 소녀들의 꿈을 위한 여정은 어여쁘고 빛나면서도 너무나 필사적이고 간절해서 애처로울 정도였다.
인터뷰를 보니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열정과 에너지로 가득 찬 그들을 힘 빠지고 눈물 나게 하는 단 하나.
그건 바로 “언젠가 데뷔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었다.
그 의문이 의심이 되고 불안이 될 때 가장 힘들다고 했다.
힘들고 지치고 배고프고 아픈 건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꿈을 이룰 수만 있다면 더한 것도 참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영
데뷔를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맥이 빠지고 힘이 풀린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빨리 다른 진로를 찾아야 하나 걱정하게 된다고.
내가 딱 그랬다. 계속 여기에 매달려도 되는 걸까? 지금이라도 다른 친구들처럼 회사에 취업해야 하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함께 스터디를 하던 언니 동생들이 합격해서 축하파티를 하거나 이제 취업을 해야겠다며 다른 길을 찾아 떠난다는 통보를 받을 때면 흔들렸다.
나 정말 누구보다도 열심히 할 건데.
시켜만 준다면 정말 잘 해낼 자신 있는데.
정말 딱 한 번만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 고 기도를 하면서 잠들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엎드려 잠든 날도 많았다.
면접날 아침마다, 깔끔하게 쪽진 머리를 하고 빳빳하게 다린 새하얀 블라우스에 정장 스커트, 작은 키를 보완할 하이힐을 신고
세상 좋은 일 있는 사람처럼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도
언제까지 이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나, 끝나기는 할까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쉬는 작은 한숨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을 때,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았던 적도 많았다.
응원을 해주는 사람들 얼굴을 떠올리면 기어이 눈물이 나와 곱게 공들여 한 메이크업이 지워질 것만 같았다.
이제는 실망하는 게 우스울 정도로 수없이 많은 불합격 통보를 또 받은 날,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이 내가 늘 가고 싶다고 했던 비싼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서 고등어 초밥을 사주면서 “언젠가 될 거야 분명히. 지금이 아닌 것뿐이야”라고 위안해 주는데
“맞아! 나도 알아! 나 진짜 잘할 텐데 그치이!!!”라고 씩씩하게 웃으며 대답을 하고 나서 고등어 초밥을 입에 함! 하고 넣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진짜 눈물이 터져서 어린애처럼 울어버렸다. 초밥을 입에 물고 펑펑.
그날을 떠올리면 26살의 내가 너무 안쓰러워서 꼬옥 안아주고 싶다.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가 그랬다.
지금의 네가 그때의 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보다고.
그래서 네가 포기하지 않았나 보다고.
정말 포기하지 않은 게 이상할 만큼 나는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했다.
최선을 다하면서도 합격은 기대하지 않는 이상한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정말 갑자기
합격을 했다.
싱가포르 베이스의 싱가포르항공 자회사 신생항공사였다.
계속해서 스펙을 쌓던 나는,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이력서에 중국어 회화가능 fluent 칸에 겁도 없이 용감하게 v 체크를 했다.
싱가포르는 영어만큼 중국어를 많이 쓴다는 사실을 모르고 한, 무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2차 면접 즈음, 싱가포리안 면접관이 내게 중국어를 하냐며
갑자기 중국어로 질문을 했다. 당황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아예 못하는 건 아니었으니 집중해서 대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질문이 의문사(영어라면 who) 谁shei로 시작했으니 답은 사람이겠네? 싶어서 일단 어머니 아버지라고 대답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임기응변이다.
면접관은 그래???? 라며 이어서 질문을 계속했지만 비슷한 방식과 짧은 중국어로 위기를 모면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 질문이 뭐였는지 모른다.
어찌 됐든 나는 그날 합격통보를 받았다.
3주 후인 10월 4일 싱가포르로 떠나 살게 되었다. 첫 해외살이라니 설렜다.
싱가포르에 도착해서 집을 렌트하고, 세간살이를 마련하고 나서야 한숨 돌리며 트레이닝이 시작되기 전, 나를 포함한 네 명의 동기들과 함께
센토사 섬으로 놀러 갔다. 예쁜 바닷물빛을 보면서, 피자와 맥주를 시켜놓고 cheers!! 잔을 부딪치는데
너무나도 행복해서 당장 까무러쳐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나 정말 승무원이 되었어.
내 꿈을 이루었어.
너무나도 소중해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던 내 인생 첫 번째 꿈.
싱가포리안들의 영어는 미국식 영어나 듣기 평가방송에 익숙했던 내게(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너무나 어려웠다. 이게 영어인가 싶었고,
그래서 잘 못 알아듣는 우리를 싱가포리안들은 답답해했다. 한국인들을 제외하고 그곳에서 가장 의지하고 친하게 지냈던 건, 같은 외국인 신분인 대만인 동기들이었지만
그들도 트레이닝 중 영어가 장애가 될 때면 중국어로 해결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비록 수업 중에는 조금 못 따라가는 것 같아 보여도, 필기시험은 모두 만점이었다. 기내방송도 싱가포리안들을 제치고 가장 높은 등급을 받았다.
언어라는 건 조금만 지나면 익숙해지게 마련이라 곧 괜찮아지게 되어있었다. 안전하고 깨끗하기로 유명한 싱가포르인 만큼 생활환경에도 금방 적응했다.
그렇게 8주간의 트레이닝을 마치고, 비행을 시작했다. 감격스러웠던 첫 인천 비행 랜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저가항공사이고 생긴 지 1년이 갓 넘은 신생항공사인만큼, 실망스러웠던 부분들도 많았다. 노선이 다양하지 않았고, 레이오버도 적었다.
레이오버 호텔에 가면 2인 1실로 룸을 셰어 했다. 월급도 터무니없이 적어서, 비싼 싱가포르 물가에는 부족했던 터라, 남자친구는 종종 한국에서
돈을 부쳐주었다. 돈을 벌러 온 건지 쓰러 온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승무원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를 실망하게 했던 건 저가항공사에서의 비행은 내가 생각했던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저가항공사였던 만큼, 서비스라는 시퀀스 자체가 아예 없었다. 승객들의 편안한 비행을 위해 승무원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내식도 그때그때 주문을
받는 식이었고 따라서 승객에게 다가갈 일도 거의 없었다. 오로지 안전만이 승무원이 신경 쓸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한국에서 면접 준비를 함께 하다가 카타르항공에 합격해서 입사한 스터디원 언니가 싱가포르에 비행을 왔다며 연락을 해왔다.
신나는 마음으로 언니의 카타르 동료도 함께 만나 싱가포르의 이곳저곳을 함께 다니며 각자 회사와 비행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그때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부러움이었다.
내가 꿈꿨던 비행은 저런 건데.
이곳에서 비행을 하면서 할 일이라고는 세이프티 데모뿐이었던 나는 물론 몸은 편했지만, 비행 전부터 각종 서비스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닌다는 카타르항공의 승무원이 너무 부러웠다. 종종 승무원은 chicken or beef?라는 말하는 게 다라는 비아냥 섞인 우스갯소리에 발끈하면서도
나는 그조차 안 하는 승무원이라는 생각에 회의감이 몰려왔다. 더 크고, 더 유명하고, 더 다양한 국적의 승객과 동료들, 더 많은 노선이 있는 회사로 가고 싶었다.
센토사에서 행복에 겨워 죽을 수도 있겠다던 나는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고 욕심이 끝이 없구나 싶으면서도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한국도 그리웠다.
그냥 재미없었다.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지만, 그게 또 발전의 원동력이 아니겠는가.
나는 5성급 항공사가 다니고 싶어 졌다. 그곳에서 비즈니스 클래스, 나아가 퍼스트 클래스의 서비스를 배우고 싶었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더 이상 지금의 회사는 다니고 싶지 않아 졌다. 비행도 가기 싫었다.
그러던 차에 프러포즈를 받아서 퇴사를 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운 좋게 3-4시면 퇴근하는 외국계회사에 입사를 했고, 결혼식을 올렸다.
내 꿈 한번 이루었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월급도 비행할 때보다 더 많았고, 카타르항공에 다녀도 이만큼 벌 것 같지는 않았다.
몸도 편하고 매일 집으로 퇴근하면 강아지가 반겨주었다. 떡볶이든 김밥이든 치킨이든 먹고 싶을 때 합리적인 가격으로 브랜드를 골라 사 먹을 수 있었다.
붕어빵도, 데이트도, 싱가포르나 카타르에는 없을 하얀 눈도, 비행을 잊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때 자꾸 생각났다. 몇 번이나 들었던 그 말이.
“너는 원하는 건 반드시 해내는 애구나”